그녀를 찾아서

by 이채이

영산강 하류에 가을을 건지는 여인을 만나러 간다. 다정한 그 사람은 누워 계신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다. 운주사 부처님은 색과 공의 한복판에서 눈을 뜬 채 밤을 맞는다. 밤의 솔숲은 저고리를 여미듯 바람을 품고, 북쪽에서 스며든 바람은 돌처럼 굳은 부처님의 옷자락을 들추며 논다. 그 순간엔, 석불도 엷은 웃음을 지어 강물에 미소가 번진다.

간절한 바람을 산자락에 모아 한꺼번에 쏟아부으면, 그것은 기억이 되고, 나무가 되며, 돌이 된다. 여인의 임무는 돌로 돌을 문지르는 일이다. 거친 돌을 문지르고 갈아서 둥글어지면, 둥글어진 것은 돌이 아니라 제 마음인 줄을 안다.

종일 걸어 강에 이르면 부르튼 발바닥에 피가 고인다. 종이에 싼 돌가루를 조심스레 발에 바르고 앉았다. 강은 아직 푸르고 목을 내민 남생이는 버들잎을 먹고 있다. 후두둑 잎이 떨어지고 잎을 받아낸 물은 초록으로 잠시 물들어 간다. 그녀가 발을 담그면 피딱지는 풀어지고 고인 피가 흘러 붉게 흐려진다. 붉어진 것이 아픈 것들을 끌어모으고 저마다의 몸에 인장을 찍어 새긴다. 애가 닳은 마음은 흘러가지 못하고, 희미한 신음소리를 내며 고여있다.

내가 운주사의 부처님을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양전에 올릴 것은 재물이 아니라 멍들고 욱신거리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 마음은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 잃어버린 그리움처럼, 놓고 돌아서도 또 실려 올 것이라고 했다. 막혀버린 하구의 둑 때문에 바다는 강으로 회귀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살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환생의 고리에서 영산강은 막혀버린 채로 아득하다고도 했다.

암호문을 해독하듯 그녀의 말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강에서 우리는 만났다.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만난 그녀의 손에는, 주술문이 가득한 남생이가 들려 있었다. 등딱지의 축원문을 지우고 또 지우고 있었다. 검은 글씨가 지워질수록, 강은 더 검붉어졌다.

오후의 가을빛이 내리고 있었다. 그 풍경은 바람 같고, 꿈같았다. 운주사의 부처님은 어찌 되었느냐고 묻자, 밤사이 눈에 티끌이 고였다고 했다. 부처의 말씀이 누워서 넘치는 까닭에, 두 발을 못 쓰는 자도 귀를 기울여 들을 수 있다고도 했다. 순례자의 백팔 배는 백팔 번의 넘어짐으로 완성되고, 무릎으로 기어가서 머리를 돌에 찧으면, 백팔 개의 번뇌는 씻어진다고도 했다. 매번 이마에 피가 고이고 혼절하고 나면, 운주사의 동자 불이 자신을 안아서 일으켜 주신다고도 했다.

예수의 성에 거하던 그녀가, 부처님의 숲에서 맨발로 가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녀의 신은 달라진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넘어 깊어졌다. 상처 난 걸음을 마중하는 것은 길섶의 잡풀과 때마다 색을 바꾸는 영산강이다. 멀어서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공간 속으로 그녀는 나아간다. 여자로서 아름다움도, 사랑하는 것들도 마다하고, 그저 노을에 젖고 바람에 눅눅해진 시간만 남아있다.

그녀는 사라지는 것들을 아름답다 여긴다. 쓰러지는 것, 상처 난 것들을 긍정하며, 절뚝이며 걷는다. 그녀의 걸음은 느려지고 아린 발바닥을 따라 선명한 자국이 찍혀난다. 그 붉은 것은 삶을 지속하게 하고 숨 쉬게 한다. 대지에서 버림받은 것은 강으로 흘러들어 하구에 모인다. 뒤엉켜서 밀려든 세속의 것들 위로 부처님은 누워서 설법하신다.

축문을 지운 남생이는 곧 성불할 수 있을까. 그녀를 따르는 나는 운동화를 벗고 산길을 오른다. 발바닥의 굳은살이 조금씩 단단해 짐을 느낀다. 산길과 물길은 서로 닮아서 굴곡졌다. 내가 산길을 걷는지 강물을 건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염주처럼 둥글고 단단했다. 아프면 부처님 곁에서 돌을 갈고, 그리우면 강에 가서 발을 담근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를 토닥이지 않았다. 허공에 머물지 않고, 바닥을 타고 흐르는 불성의 말씀을 따라 걷고 있을 뿐. 걷는 것이 곧 기도였고 예배였다.

이 길이 끝나면 부처님을 만날 수 있을까. 누워서 별만 헤아리는 바위에 스민 그분의 마음을, 그때는 알 수 있을까.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바닥의 고통이 기도의 리듬이 되어 박힌다. 그녀가 건져 올린 가을의 말들을 한 바랑만큼 주워 담는다면, 그때야말로 나도 말씀만큼 비워질 수 있을까.



*사진은 지구별 여행이야기 블로거 혜천님의 것입니다.

keyword
이전 07화초록물이 빠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