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꽃을 꺾어 보냈다

by 이채이

사는 것이 간절할 때가 있다. 간절하게 살아주기를 바랄 때가 있다.

찬바람에 코끝이 얼얼해도, 몇 숟갈 국물이 혀를 타고 목젖으로 넘어갈 때 몸이 서서히 덥혀짐을 느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스팔트에 닿는 감촉이 온몸을 깨운다. 푸르던 콩꼬투리가 여물어간다. 싸락눈 같던 수수꽃이 알곡으로 들어찰 만큼 시간이 흘렀다. 겨우 숨을 돌리고 차 한 잔을 곁에 두면, 날이 저물어 가는 것을 안다.

그녀의 소포를 받았을 때, 그리움이 통증처럼 밀려왔다. 시집 속에 끼워 보낸 그녀의 마음이 덜 마른 압화처럼 향이 났다. 가을이면 그녀는 스르륵 페이지를 넘겨 책을 골라 담듯이, 무심한 듯 시를 보내곤 했다. 그 시는 고운 비단옷을 입었다.


비단 조각에 시집을 싸면서 사각거리는 마음을 접고 매만졌을 그녀가 떠올라 눈을 감았다. 물든 은행잎 두어 장은 편지처럼 노랗게 갈피에 끼워 두었다. 눈물이 고이는 건 그 순간부터다. 첫 장을 넘기면, 동글동글하고 삐친 데가 없는 글씨는, 사방 각을 맞춰서 온화하게 쓰여있다. 필체가 단정한 그녀의 편지를 읽을 때, 미소 짓는 입가를 따라 물방울이 도르르 번진다.

먼 시간을 배달해 주는 성실한 우체부. 그가 두고 간 사진 속에는, 세월에 순응하는 그녀가 있었다.

과꽃 옆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정지된 시간 속 그녀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한 손으로 흩트리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인화지 밖으로 건너와 내 마음을 건드렸다. 그녀는 말을 걸고 있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목울대를 넘어오지 못하고 걸려있다. 이는 가늠할 수 없는 마음 한 토막이 걸려서 기쁨으로 역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미소는 생의 긍정처럼 보이면서도, 고통이 가려진 부정 같았다. 수많은 가시에 찔렸던 그녀의 삶이 서서히 아물어가는 것은, 세월이 내어준 내밀한 반창고 같은 것이다. 얇은 반창고는 아픈 삶의 출혈을 멈춰 피딱지를 만들었듯, 그녀의 상처에도 새살이 돋게 했다.

사는 동안 서로 각자의 상처를 돌보았으나, 우리가 서로의 아문 흉터를 다 알 필요는 없었다. 그저 아픔을 감내한 만큼 성숙했다는 사실과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어도, 훌쩍 서로의 시간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오랜 기간을 함께한 사람에게는 세월을 뛰어넘는 인정과 믿음이 있다. 그저 그러하다는 끄덕임과 긍정이 있다.

하여 우리의 통증은 날 것의 현재가 아니라, 서랍 속 오래된 비디오 필름을 되돌려 보는 것처럼 묵은 구석이 있다. 농진하던 번민의 속도가 느려지고, 감당할 만한 크기로 그늘이 줄어들면, 그녀는 다짐하듯 책을 보내온다.

시집에는 미안하다고 적혀 있었다. 나만 구차하게 살아서 미안하다고. 면목 없는 미안함으로 부끄러움도 포기하며 살았노라고. 날 선 비가 장대처럼 내려 마음이 요동치거든 이 시를 읽고, 제 삶을 어루만지며 살면 되는 것이라고.

나는 그녀의 구차함도, 면목 없는 미안함도 알지 못한다. 다만 이 글이 지금 읽어야 할 시가 아님을 알 뿐이다. 무던히도 그녀가 보고 싶어 답장이라도 쓰고 싶은 날, 그런 날 펴서 읽는 글이라는 걸 알고 있다.

왼손으로 얇은 책 등을 잡고 오른손 엄지를 튕겨서, 페이지를 후루룩 넘겨본다. 그 안에는 향기가 배어있다. 그녀는 서너 송이 과꽃을 꺾어 갈피마다 꽂아 두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나에게 보내는 다정함이고 진짜 편지임을 안다.

물들어가는 10월의 가로수 길을 걸으며 간절함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술에 기대어 하루를 버티는 사내에게도 빈 술병만큼의 간절함은 있을 것이다. 비틀거리며 걷는 자와 술 취한 사내의 뜻 모를 주정을 들으면, 그들에게 고뇌를 잊은 숙면을 선물하고 싶다. 이것은 깊고 포근한 것이며, 평안과 위로를 주는 것이다.

숙취에 깬 아침이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아내가 투덜대며 술국을 끓여주고, 백치처럼 웃어주기를. 바늘 같은 충고의 말없이, 거저 밥 한 끼 먹여서 다시 세상으로 걸어 나가게 해 주길. 애타게 살고 싶은 사내의 속내를 막아서지 말고, 모른 척하며 그냥 넘어가 주길. 온 잎을 다 떨구어 초라해지더라도 제 스스로 아픔을 감당하고 이겨낼 시간을 주길. 그리고 봄의 새잎을 기대할 여지를 남겨두길.

시는 은근한 향내를 흘렸다. 전해진 마음 또한 부드러운 비단 같다. 그녀의 마음을 코끝으로 짐작하며, 그것을 사랑의 뚜렷한 징표로 여겨서 이 계절을 견뎌낸다. 내년 봄, 그녀에게 답신할 꽃가지를 상상한다. 서가의 시집을 뒤적이는 내내 설렌다. 이런 날이면, 위로받은 만큼 토닥여 달래주고 싶어진다. 조금 더 간절히 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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