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눈 쌓인 들판에 홀로 선 사진을 보내왔을 때, 편지에서 풍기는 갯냄새에 눈을 감았다. 소금처럼 뒤덮인 겨울의 풍경에서 끈적한 소금밭, 염전의 향이 풍겨서였을까. 편지에 박힌 글자는 일제히 일어나고 증발하면서 자모의 배열을 맘대로 바꾸고 뒤섞였다. 편지는 어지럽지 않았으나 은근한 소금기의 이유가 그대의 눈에 고인 눈물 탓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봉투 안에 가득했던 헝클어진 활자는 제멋대로 해석되고 읽혀져서, 해독 불가 상태가 되었다. 흩어진 활자들이 나를 흔들어 놓았다. 이런 순간에는 단어 하나도 잃어버리면 안 된다. 봉투가 너의 글을 감싸듯, 나 또한 너의 말들을 고이 껴안고 싶어진다.
내게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말 대신 담담히 풍경으로 일갈하는 너의 무심함이다. 행간의 층위나 내용의 진위를 해석할 수 없는 너의 편지를 받는 날은 마음에 멍이 든다. 멍은 시간을 두고 온몸으로 퍼져서 퍼렇다가 붉었다가 누레진다. 그러기를 두어 계절 되풀이하고 나면 겨우 답장을 쓸 수 있다.
운전을 하던 중 별안간 마주한 9월의 눈밭. 네가 이곳에 있었음을 전생의 기억처럼 안다. 내 기억에는 아득한 시간의 낱장을 넘기다 보면, 그 가운데 네가 있을 것이었다. 산비탈 좁은 천수답마다 그득그득 메밀꽃이 피어있었다.
밭둑에 털썩 주저앉아 너를 생각했다. 메밀꽃에서는 오래 묵은 조선장 냄새가 났다. 분주한 등에들이 날아들어 소금을 모으고 있었다. 꽃들은 제각기 흔들리고 있었고 그 움직임이 잔바람을 만들었다. 잔바람은 미소 같아서 햇살에 날아가 버릴 듯 가벼웠다.
센 바람이 와서 겹겹이 쌓인 밭을 훑고 지나간다. 일순 큰 파도가 일어 밀물처럼 네가 들어온다. 밀물은 대책 없이 닥쳐와서 기억의 밑바닥까지 헤집어 놓는다.
나는 오래된 사랑을 잊었기에 네 편지 속 눈물기도 흐릿한 줄 알았다. 그러나 그리움은 이렇게 흔들리며 단숨에 소환되는 것이었다. 없애고 삭이고 문질러낸 자리마다 애틋함은 어김없이 들어찼다. 가득 찬 것들은 달의 조화를 닮아서 썰물로 씻겼다가 밀려오고, 무심하게 다시 밀려왔다.
잔향을 지우고 또 지워도, 짠 내처럼 눅진하게 남아있는 것은, 우리가 사랑했던 아프고 행복했던 순간일 것이다. 밭둑에 쓰러져 있던 나는 웅성대는 소리에 깨어났다. 손을 뻗어 메밀꽃 한 줌을 꺾었다. 그 한 줌을 봉투에 넣고 이제야 답장을 쓴다.
"9월에 서 있다. 여기도 눈이 내렸다."
편지를 부치고, 지난겨울 너의 글을 다시 열어서 사진을 꺼낸다. 순간 시간의 경계가 풀려 버린 듯한 바람이 일어 온다. 눈이 녹아서 흘러내린다.
그 사진 속에는, 출렁이는 메밀밭에서 어정쩡하게 웃고 있는 '내'가 서 있다.
흐릿한 사진 속 풍경은 흔들리며, 꿈과 기억 사이에서 나는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순간 뒤틀렸던 활자가 제자리에 내려앉으며 선명해졌다. 겉봉에 적힌 다섯 글자.
"수취인 불명"
영원히, 그대에게 닿을 수 없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