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 절정

by 이채이


봄꽃이 와르르 떨어진다. 바람은 먼 북쪽에서 꽃들의 장례를 치르러 왔다.

바람은 염탐꾼을 먼저 보내서 가지를 살살 흔들어본다. 피지도 않은 숨을 떨굴 리 없는 봄꽃들은, 옷깃을 여미고 언 발을 동동인다.

찬바람에 볕이 따가운 낮이 되면 꽃들은 벙그르르 부풀어 오른다. 옷깃을 붙잡던 단호함은 봄볕에 누그러지고, 단번에 저고리를 풀어헤친다. 처음 맞는 신산한 계절의 향내에, 꽃들은 숨을 벌렁거리며 웃어댄다. 웃음소리는 전염되어 번져간다. 제 계절을 이기지 못한 봄 것들이 땅속에서부터 터져 나온다.

봄의 꽃들은 얇고 가볍고 오래간다. 무명 시절이 긴 배우의 삶처럼, 오래 꽃눈을 품고 견딘 시간만큼.

그러나 북풍이 멈춘 자리에 동풍이 들어서면, 꽃들은 속까지 뒤집으며 격렬하게 분분한다. 개화만을 기대한 이들에게는 봄꽃은 이토록 짧다. 내밀한 기다림을 알 수 없는 상춘객들은, 무명의 세월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꽃을 온전히 누리는 방법은 제가끔이다. 올려다보아야 하는 꽃이 있다. 무리 지어 대궐을 이루는 꽃들이 있다. 매화가 그러하고, 살구가 그러하다. 산모롱이 집을 둘러싸고 일제히 피어날 때, 아리따운 황후를 올려다보는 백성의 심정으로 넋 놓고 본다.

시간을 살펴 가며 보아야 하는 꽃이 있다. 배꽃은 밤에 보아야 한다. 나즈막한 가지 사이로 푸르고 흰 꽃이 달빛 아래서 빛난다. 배꽃이 뜰에 가득한 밤이면, 우리는 술에 취하지 않아도 몽롱한 취경(醉境)을 즐길 수 있다. 밤의 배꽃은 달에 소원을 빌던 젊은 여자의 다소곳한 미소를 닮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아야 하는 꽃이 있다. 그것은 이내 흩어질 것들이고 형체가 없어 꽃으로 보이지 않는다. 안개처럼 뿌옇게 세상을 끝내 뒤덮어 버린다. 송화는 꽃이 아니고 겨우 꽃의 이름만 가졌다. 눈을 크게 뜨면 그 형체는 흩어지고 텁텁함만 가득하다.

송화는 사랑은 보여주지 않고, 그저 사랑의 기억만 상기시키는 판소리의 예고편 같다. 아씨의 담장을 기웃거리며 종일 제자리를 맴도는 상사병 난 남자의 가슴 터짐이 있다. 그의 열정은 숲의 가운데서 뿜고 또 뿜어져서 세상을 휘젓는다. 하늘에서 황금비가 내리면, 실눈을 뜨고 가만 서 있으면 된다.

숨을 꼬옥 참고 보아야 하는 꽃이 있다. 봄의 얼레지는 깊은 산속 낙엽수림 아래서 큰다. 따순 햇살도 마다하고 청정하고 그늘진 곳에서 물들어 있다. 부끄럼이 많은 꽃은 활짝 열렸다가 이내 오므라들어 버린다. 자세히 보려거든 낮은 자세로 숨을 참고 보아야 더 어여쁘다.

봄꽃이 바람에 날려간다. 꽃들의 장례식은 꽃들의 절정 같다. 낙화는 인생의 완성태 같다. 나의 삶이 꽃과 같다면. 죽음의 순간에도 저처럼 아름다움을 남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나의 환생은 꽃잎처럼 가볍게 팔랑여서, 봄의 시간 속에서 헤매기를 꿈꿔본다.


*사진 얼레지 - 두산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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