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골목길을 걷는 것 같다. 낯선 동네의 좁고 굽이진 길.
마을의 초입에 서서 마음이 이끄는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시골의 집은 담장도 지붕도 낮아서 슬슬 걸으며 스쳐보기에 좋다. 산보하듯 생각을 풀어놓기 좋다.
하늘색 지붕 집에 왔다. 담장에 매달린 꽃과 아기 주먹만 한 열매를 들여다본다. 하늘 수박은 먹지 못한다. 하늘 수박꽃은 거칠게 헝클어졌다. 마당을 쓸어서 끝이 갈라지고 모질어진 빗자루처럼. 볼품없는 꽃과 먹지 못할 열매가 엮여 넝쿨이 제법 질겨졌다.
생각은 하늘 수박처럼 늘 쓸모없어 보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쓸모를 따지는 순간, 생각은 이미 도착지를 정해 둔 궤도 속에 갇혀버린다. 쓸모로 재단하고 버려왔던 많은 것들이 나를 서늘하게 흔든다.
생각은 결국 무수한 쓸모없음을 쓸어 모아 간직하는 일이다. 그 뒤엉킨 꽃을 보고 있으면 꽁지 빗으로 빗어 가지런하게 묶어주고 싶다.
골목을 따라 걷는다. 능소화가 밖으로 늘어진 담 쪽으로 걸음이 간다. 능소화가 수북이 이울어졌고 황토 바닥은 온통 붉다. 이울어지는 조화는 절대자의 영역이고, 그 시간 쪽으로 기운 것은 낙화다.
나는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늘 두려워했다. 그러나 낙화처럼, 생각 역시 제때 사라지지 않으면 다음 생각이 필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꽃은 오래 매달릴수록 다음 계절을 잊는다. 바닥에 떨어진 붉은 꽃은 종이에 쓴 메모처럼 고이 줍는다.
하나의 생각과 한 점 꽃이 주는 사념이 다르지 않으리라 여기며.
봉숭아가 한가득 핀 수돗가에서 열무를 씻고 있다. 그 집을 지키던 젊은 여인은 할머니가 되었고, 그녀의 허리는 골목길처럼 굽었다. 콸콸 수돗물을 틀어 놓고 열무는 싱그럽게 물장구친다. 산에서 내려온 물은 수도꼭지에 이르러 열무의 흙을 털어내고, 밖으로 퍼지며 엷은 무지개를 띄운다. 분명 햇살과 바람의 합작품이다. 그 물처럼, 나의 잡념도 이렇게 시원하게 씻겨나간 적이 있었던가.
쪽파와 열무 씻는데 열중하는 모습, 휘어진 손가락과 몸의 굴곡이 다듬어 내는 온전한 리듬. 나뭇가지가 바람에 휘청이듯 자연과 하나 된 나이 든 그녀, 할머니는 이제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다. 오직 이 순간, 땅이 길러낸 푸름처럼 자신도 조금 젊어지고 싶을 뿐. 그녀가 낭비할 새도 없이 세월은 지나가 버렸다.
이제 가지고 싶은 것을 떠올릴 때, 오로지 소망하는 것은 젊음 하나.
나이 든 그녀가 간절히 바라는 유일한 그것이, 이미 내 안에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각은 천천히 허무 쪽으로 기울어진다.
더 가지기 위해, 더 인정받기 위해 나는 나를 너무나 소모했다. 가장 소중한 것을 가지고도 알아채지 못했던 나를 떠올린다. 가장 풍부하게 가진 것을 가장 헛되이 낭비했던 기억-젊은 날의 젊음이 아까움을 이제야 깨닫는다.
골목은 시간을 구부리고 감꽃을 떨구었다. 세월은 사유의 끝까지 나를 데려간다. 어쩌면 사유란 새로운 생각을 더하는 일이 아니라, 곁에 있었던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생각에 잠기고픈 날이면 시골의 낯선 골목길을 걸어보면 안다.
막힌 곳이건 꺾인 곳이건, 그곳에는 충실하게 삶을 살아낸 사람들이 쓸어 낸 경쾌한 빗자루 자국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곳에는 흐릿한 생각을 말끔하게 쓸어 내고 아침의 새것 같은 능소화가 두어 송이 떨어져 있을 것이다.
사색은 나에게 새로운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산보하듯 풀어놓은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그저 걸음을 늦추게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