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 놈만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튀르키예(feat. 주먹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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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남에게 보답하고자 밥값을 계산했는데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기차남이 단단히 화가 난 것이다! 그는 왜 자신의 손님인데 밥값을 계산했냐며 엄청난 모욕을 당한 것처럼 불쾌해했다. 우리가 고마워서 그랬다며, 한국에선 은혜를 보답해야 하는 게 예의라고 말해봤지만 이미 기분이 상한 그는 들은체만체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우리만의 치트키, 출동!
[센 놈만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튀르키예(feat. 주먹다짐)]
급속히 가라앉은 분위기를 구하기 위해 꺼내든 비장의 카드는 바로 '나이 맞추기'였다.
우리 셋 다 한국에서도 어려 보인다는 소리를 종종 듣곤 하는데, 동양인들의 나이를 잘 가늠하지 못하는 외국인들한테는 정말 백이면 백,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었다.
우리의 나이를 말하기 앞서 기차남의 나이를 물어봤다. 우리는 기차남을 40대 중후반쯤으로 봤다. 정말 잘 쳐줘야 30대 후반 정도였다. 그런데 그의 실제 나이를 듣곤... 우리 모두 뒤집어졌다.
98년생이라고 했다. 효일이보다 3살이나 어린것이다. 세상에나... 그 나이에 그 비주얼이라니. 우리가 믿지 못하자 ID카드 같은 걸 꺼내 증명까지 해줬다. 우리가 너무 놀라워하자 그가 자기가 몇 살 같아 보였냐고 물었는데 우리 중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냥 사람 좋은 얼굴로 히죽 웃었을 뿐이다. 놀랍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우리가 그의 나이를 듣고 요란법석을 떨자 그도 조금씩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매야. 누가 첫째일 것 같아? 일단 우리 순서를 맞춰 봐."
기차남은 순서를 정확하게 맞췄다.
"그럼 우리 몇 살 같아?"
"효일이는 22~23살, 효둘이는 20살, 효삼은 19살쯤?"
우리의 예상대로였다. 우리가 실제 나이를 말했더니 기차남은 말도 안 된다며, 이전의 텐션을 금방 되찾았다. 그리고 정말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위기 전환에 성공하고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기차남이 효일을 보고 말했다.
"너는 잠만 자서 안 큰 것 같아. 5분 이상 앉아 있으면 코알라처럼 잠들잖아."
우리 모두 코알라를 잘못 알아들어서 "코엘라? 쿠엘라? 쿠알라룸푸르?" 하며 의미 없는 소리를 하자, 친절한 기차남이 굳이 굳이 구글에서 코알라 이미지를 찾아 보여주며 말했다.
"얼굴은 안 닮았는데 행동만 닮았어."
효둘과 효삼은 깔깔거리며 웃었고, 효일은 '닮진 않았다니 다행이다' 생각했다.
분위기가 풀린 뒤, 그는 다시 '손님 극진 대접 모드'에 돌입했다. 효삼이 길거리에서 파는 군밤이 반가워 아는 척을 하자, 그는 주저 없이 군밤을 사서 우리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리곤 택시를 두 대를 잡아 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주었다. 택시비를 내고 싶었는데 한 번 더 돈을 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고맙고 귀한 은인과 안 좋은 끝을 보게 될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기차남이 사람들에게 돈뭉치를 건넬 때마다 우리는 먹었던 음식들이 얹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하고 우리는 깜짝 놀랐다. 우리가 생각한 버스터미널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처럼 지역에서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행사들이 모여 있어 호객 행위가 있었고, 딜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질 것이었다.
기차남은 여러 군데에 들려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우리는 새끼 오리 마냥 그의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녔다. 기차남이 마음에 드는 곳을 찾은 후, 우리에게 여권을 달라고 했다. 사실 의심이 남아있었지만 별 수 없었다. 다행히 잠깐 확인 후 금방 여권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버스가 올 때까지 앉아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처음 들렀던 여행사 할아버지가 기차남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터키어로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하길래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는데 할아버지의 얼굴이 기차남의 입술과 닿을 듯 가까워졌다. '뭐지?' 하는 순간, 할아버지가 멜론 같은 커다란 주먹을 들어 기차남을 후려갈기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기차남의 멋쟁이 선글라스가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우리는 어쩔 줄 몰라 일단 선글라스를 주워 들고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할아버지 체격이 좋아서 종잇장 같은 기차남이 휘청거렸다. 기차남은 가라테를 배웠다고 했었다. 기차남이 앙상한 다리로 발차기를 했다. 공격력은 없어 보였다. 다행히 할아버지가 그걸 피하려다 발목을 접질렸고, 몰려온 남자들이 두 사람을 제지하면서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우리는 기차남에게 선글라스를 돌려주며 괜찮냐고 물었다. 기차남은 웃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이게 터키의 방식이야. 우리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야. 아주 흔한 일이니까 너무 걱정 마."
그의 대답에 우리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저렇게 몸체가 두껍고 단단한, 털 많은 사람들과의 주먹다짐이라니. 우리가 저런 싸움에 걸려들게 된다면 안 봐도 뻔했다. 백전백패다.
터키는 약육강식의 세계였던 것이다. 강한 자만 살아남는 서바이벌 게임 같은 곳...
"도대체 저 할아버지는 뭐가 저렇게 화난 거야? 우리가 자기네 여행사를 이용하지 않아서 저래?"
"우리가 계약할 것처럼 했는데 안 하니까 화가 났나 봐. 사실 왜 저러는지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아까 저 사람 가게에 갔을 때 너희들 여권으로 뭔가를 꾸미려고 하는 것 같아서 나온 거였어."
예상치 못한 격투씬에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아직 하루가 반도 안 끝난 상황이었다.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차남과 함께 하는 그날 하루가 너무 길어 고단하고 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