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고맙긴 한데... 그만 친절해... 그만 도와줘!
"맥주 마실래?"
"너 담배 피워?"
옆 침대에 앉은 남자는 계속해서 효일에게 말을 걸었다. 효일이는 자는 척을 하거나 드라마를 보는 척하며 그의 대화를 피해보려 했지만, 깨어난 것 같거나 눈이 잠깐 마주치면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배 안 고파?"
"응, 안 고파. 괜찮아."
"너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응, 근데 진짜 배 안 고파."
"부끄러워하지 마. 나한테 먹을 거 있으니까 이거라도 먹어."
남자가 자신의 가방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잔뜩 꺼내 건넸다. 효일은 낯선 사람과 함께 있다는 긴장 때문인지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았다. 이미 양치까지 한 상황이라 효일이는 받은 음식을 옆에 두기만 했다.
효일이는 그 남자의 친절이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럽고, 괴롭게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 칸에 두 사람이 더 탔다. 웃는 게 예쁜 젊은 여자와 단발머리의 수다쟁이 할머니였다. 수다쟁이 할머니는 그 남자를 잡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튀르키예어로 말해서 뭐라는 지는 모르겠지만, 대체로 할머니의 푸념 같았다. 이야기 상대를 만나 즐거워하던 남자의 시간이 지날수록 낯빛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ㅋㅋㅋ)
몇 번의 여권 검사 후, 드디어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 튀르키예에 도착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열차가 많이 늦어진 탓에 이스탄불행 열차를 놓치고 말았다. 어쩌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같은 기차칸을 썼던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자신도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한다며 가는 김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심지어 자신의 카드로 우리 셋의 지하철 교통비까지 결제해 주었다.
'튀르키예인들은 원래 이렇게 다 이렇게 친절한가?' 싶으면서도, '이렇게 안심시켜 놓고 우리 돈이나 물건을 다 털어가려는 거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호의를 호의로 받지 못하고 자꾸만 그를 의심하는 우리가 싫었지만, 리라(튀르키예 돈)의 가치가 곤두박질치면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 악질적인 범죄가 유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탓에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남자는 우리의 고물덩어리 캐리어를 들어주었다. 괜찮다고 사양해도 괜찮다는 말이 돌아왔다. 남자는 우리보다 키는 크지만 체격은 비슷했다. 그런 그가 끙끙거리며 우리의 캐리어를 들어주는 게 고맙고 미안하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그 남자와 헤어지려 했지만, 또 한 번 변수가 발생했다. 앙카라까지 가는 모든 열차가 매진이라는 것이다. 입석도 안 된다고 했다. 우리는 풍선 투어를 예약해 둔 상태라 그날 꼭 앙카라에 가야만 했다. 며칠 남지 않아 투어 취소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의논하고 있자 남자가 말했다.
"걱정 마. 내가 앙카라 가는 버스 터미널까지 데려다줄게."
'이게 맞나? 믿어도 되나?' 싶었지만 우리에겐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다시 한번 남자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남자는 버스 터미널에 가기 전, 밥을 먼저 먹자고 했다. 우리는 드디어 은혜를 갚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비싼 걸 먹게 되더라도 밥은 꼭 우리가 사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래.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밥은 우리가 살 테니까 네가 좋은 곳으로 가자!"
식당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곳이 없었다. 남자는 카페에 가서 쉬다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고,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기꺼이 그를 따라갔다.
계속 기차 안에만 있어 씻지도 못한 찝찝한 상태인 데다 고물덩어리 캐리어를 들다시피 끌고 다니는 것도 힘들었지만 제일 힘든 건 정신적 스트레스였다. 계획했던 일정이 다 틀어지고, 속을 알 수 없는 외국인 남자와 함께 다니는 건 생각보다 에너지 소비가 컸다.
남자가 찾은 카페에 들어갔다. 메뉴를 주문하고 계산하려는데 남자가 우리를 막고 자신의 현금으로 결제했다. 우리가 길길이 날뛰며 만류했지만, 그는 우리가 자신의 손님이라며 괜찮다고 했다. 고마움이 쌓일수록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음료를 마시면서 쉬고 있는데 남자가 물었다.
"근처에 해변이 있는데 보러 갈래?"
남자는 터키의 좋은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다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더 이상 그를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보여준 친절을 계속 의심하는 건 실례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따라 해변으로 걸어갔다.
남자는 카페 직원에게 현금 뭉치를 건네주며 캐리어를 잘 지켜봐 달라고 했다. 정말이지... 기절할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