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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직하고 깨달은 교직의 장단점

잠시 떨어져서 바라보니 보이는 것들

by Applepie

"어때, 노니까 좋아?"

지난 일요일, 친정에 들른 내게 아빠가 내게 물으셨다. 글쎄 좋긴 한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불안이 엄청 사라졌어요."
정말 그렇다. 일을 쉬고 있으니 좋은 점이 한둘이겠는가, 하지만 가장 핵심을 꼽으라면 '불안이 사라짐'을 들 수 있겠다. 온갖 의미를 다 함축한 대답이었다.

내 말에 아빠는, "그렇지. 근데 그 불안이 없으면 더 불안한거야." 라는 알쏭달쏭한 문장으로 당신의 분명한 메시지를 전했다. 내가 결혼한 이후부터 늘 딸이 일을 그만둘까 전전긍긍하는 우리 아빠는, 아무리 내가 지금은 아빠가 일할 시절과 달라서 워킹맘도 많고 무엇보다 나는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고 말해도 마음을 완전히 놓지 않으신다. 아빠의 바람대로 나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엄마이자 아내가 되고 싶다. 그렇지만 그게 꼭 교직이어야 하는지는 경력이 쌓일수록 의구심이 더해져 간다. 몇 년 전부터인가 학교는 교사의 불안을 먹고 자라는 불가사리가 되어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얼마 전, 친한 동료 선생님의 경조사 자리에서 우리 학교 선생님들을 만났다. 근 3개월만에 뵙는 거라 무척 반가웠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학교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 잘 지내세요?"

-"어, 얘 한 2주 병가 쓰다 왔어. 학생이 의자를 던지려 해서 그거 말리려다 맞았거든."

-"올해도 힘들다. 역대급이야. 진짜 까다로운 사건이 발생해서 생활지도 하는 중에 학부모한테 일 크게 만들지 말라는 문자를 받았어."

-"급식실에 그 유명인사 알죠? 감정 조절이 잘 안돼서 식판을 몇번 엎던데."

숨이 턱 막혔다. 학교의 현실은 달라진 점이 없었다. 나만 그곳에서 잠시 벗어나 있을 뿐이었다.


교직 환경이 급격하게 안 좋아진 건 내 체감으론 5년 안팎에 불과하지만 그 동안 나는 잊을 수 없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만났다. 같은 시기에 전국의 선생님들이 세상을 등졌고 동료 선생님의 빈소 두 군데에 갈 일도 생겼다. 그러면서 나는 잠이 줄고 건강염려증을 얻었으며 염려대로 건강검진 결과는 매년 나쁜쪽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불안 역시 친구처럼 나를 늘 따라다녔고 특히 심한 날에는 글로벌 영양제 사이트에서 불안에 좋다는 영양제를 직구했다. 그렇게 사들인 것들이 지금도 부엌 찬장에 쌓여 있는데 올해는 저 약통에 한번도 손을 댄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주가 벌써 하지라는데 잠이 늘어난 나는 새벽에 해가 일찍 뜨는지도 모르고 쿨쿨 단잠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도.


적지 않은 선생님들이 세상을 뜨는 동안 '학생 분리법' 이나 '민원팀 신설'같은 법안들이 만들어졌으나 문제를 해결하기엔 한참 부족했다. 그런 법이 만들어졌다 한들 교사가 그걸 쓸 수 있을 정도로 교권이 충분히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만 기분을 상하게 하면 정서적 아동학대로 교사를 신고하는 세태는 지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므로. 그리하여 나는 우리반 20여명 아이들의 기분이 좋은지, 그래서 학부모들이 불쾌하시지는 않았을지를 매일 걱정했고 문제 행동이 심각한 학생의 부모님께도 '많이 좋아지고 있습니다.'라는 거짓말을 하기 일쑤였다. 이런 나를 누구라고 비겁하다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시련이 사람을 성숙하게 해 준다 했던가. 나는 아이의 선생님들에게서 고마운 점을 발견하는 눈을 갖게 되었다. 제멋대로 글씨를 쓰던 아들이 학교를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궁서체를 쓰기 시작했다. 연필이 붓인줄 알 정도였는데 알고 보니 한 칸에 4등분으로 점선이 그어진 쓰기 공책에 바른 글씨를 쓰는 연습을 매일 한다는 것이다. 또 학부모 공개수업때 모든 아이들이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발표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들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담임 선생님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임을 바로 알 수 있었고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나는 지나간 학생들을 그렇게 가르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도 함께 딸려왔지만.

진지한 궁서체를 구사하는 1학년 아들.

그리고 처음 학교를 입학해 학교의 모든 것이 신기한 1학년 아이 앞에서 나는 척척박사가 된다. 학교에 대해 아이가 모르는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일 식단표에 떡볶이가 있지만 아마 1,2학년 급식은 덜 맵게 나올걸? 엄마는 2학년 담임이라 그게 아쉬웠어. 더 매운거 먹고 싶었는데."

"너희는 선착순으로 제비뽑기를 하는데 아이들이 불만이 없고 싸우지도 않아? 우와, 너희반 아이들 정말 훌륭하다. 엄마는 선착순 해보면 막 몸싸움도 나고 그래서 안하거든."

"강당을 2반이랑 같이 쓰는 건 너희 학교에 학급수가 너무 많아서 그래. 한 반에 한 시간씩을 주기 힘들거든."

이런 말들을 해 주면 아이는 눈이 동그래져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때로는 "엄마, 학교 얘기 더 해 주세요." 하며 나를 조르기도 한다. 평범한 내가 아이 앞에서만큼은 영웅이 되는 순간이다.


또 내가 우리집의 영웅이 된 중요한 순간이 있었다. 한 달 후 이사갈 집의 잔금을 치뤄야 하는데 믿었던 남편의 주담대가 나오지 않았다. 올해부터 사업을 시작한 탓에 작년 소득은 인정이 되지 않고 올해 소득은 7월에 신고 후 내년이 되어야 인정된다고 하여 졸지에 소득이 0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잔금을 치르지 못할 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나의 직업이었다. 결국 나를 차주로 하여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 남편은 안도와 함께 이런 말을 남겼다.

"집에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정규직이 꼭 필요한 것 같아. 너 직장 그만두면 안되겠다."

아빠고 남편이고 정작 나는 그만둘 생각이 없는데 그만두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듣는지 모르겠네.


오히려 학교에서 잠시 떨어져 지내보니 교직이 얼마나 불안한 것인가, 또 동시에 얼마나 안정적이며 어린 아이를 키우기에, 감사하는 학부모가 되기에 유리한가 하는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큰 이변이 없다면 나는 내년엔 교실에서 아이들과 지지고 볶는 익숙한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작년까지 나를 감쌌던 불안이 다시 올까 두렵지만 올해를 기억하려 한다. 떨어져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정 힘들면 또 잠시 쉴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을, 그리고 같은 불안을 이겨내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을, 또 나처럼 선생님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학부모도 많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월급날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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