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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이 틀어진 오늘도

내 삶의 소중한 한 조각임을

by Applepie

올해 아이 초등학교 입학에 맞춰 1년간 휴직을 한 나는 잠시동안 워킹맘에서 전업맘이 되었지만 생각만큼 시간이 여유롭진 않았다. 출근할때와 마찬가지로 파워 J의 삶을 살아야 하루하루를 구멍 없이 보내는 게 가능함을 휴직을 하고 오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평소와 다름 없이 아이를 등교시키고 난 목요일 아침, 잠시 소파에 앉아 오늘 할 일을 떠올렸다.

'일단 가족이 먹은 아침을 치우고 집 정리도 간단히 해야지. 저녁은 외식을 하기로 해서 다행히 저녁 준비에 대한 부담은 없고 어디 보자, 도서관 책 반납이 이번 주말까지니 오늘은 아이가 학교에 있을 때 도서관에 다녀와야겠다. 기한에 늦지 않게 반납도 하고 새로 읽을 나와 아이 책도 빌려야겠네. 사이사이 비는 시간에 운동을 하고 아이 하교시간에 맞춰 학교 앞에서 아이를 픽업해야지.' 게다가 오늘은 아이의 스케이트 수업이 있는 날이니 학교에서 2~30분 거리의 빙상장에 가야 한다. '오후가 바쁘겠군, 서둘러야겠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바로 행동에 돌입한다. 간단히 집 정리를 하고 도서관에 가려고 책을 챙기는데 이럴 수가, 아이가 빌린 책 한 권이 보이지 않는다. 책꽂이를 비롯하여 책이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책은 없다. 참, 아이가 그 책을 학교에 가져간 적이 있었지. 그렇다면 집이 아니라 학교에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아이는 분명 책을 제 사물함에 두거나 학급문고로 착각해 교실에 꽂아뒀을 것이다. 이따 하교 때 교실에 다시 가보라고 해야겠다. 오늘 책을 찾아야 내일이라도 반납할 수 있으니.


도서관에 가겠다는 계획이 틀어져 조금 언짢았지만 나는 빨리 플랜 B를 실행해야 했다. 일단 도서관을 제외한 계획을 이행하고 아이의 하교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러 갔다. 즐겁게 하교하는 아이와 밝게 인사를 한 후 본론을 꺼냈다.

"책 한권이 사라졌어. 너 그거 학교에 가져간 적 있지? 지금 교실 다시 올라가서 사물함이랑 학급문고 찾아보고 와."

역시 예상대로 아이는 내 말을 곱게 듣지 않았다.

"싫어요. 저 그거 집에 분명 가지고 갔단 말이에요. 학교에 없어요. 가기 싫어요."

나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말투는 단호해졌다.

"없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찾으려는 시도는 해야해. 올라갔다 와. 네가 빨리 올라갔다 와야 아이스크림 먹고 빙상장 갈 수 있어. 안 그러면 아이스크림 못 먹어."

몇 번의 실랑이가 오간 후(아는 엄마들이 교문에 있어서 상당히 창피했다) 아이는 결국 교실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홀가분한 표정으로 내려왔다.

"엄마, 제가 다 살펴봤는데 없어요. 우리 어서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요." 그렇게 꼼꼼히 찾으라고 했건만, 이렇게 빨리 나오다니. 그래도 찾으려는 시도를 했으니 내가 물러나야지. 책에 대한 얘기는 접어 두고 아이의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려 운전대를 잡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습 정체구간에 들어섰다. 평일 퇴근시간 한참 전인데도 이렇게 차들이 많다니, 여기는 항상 이렇지 뭐.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빠져나갈 생각을 하는데 차 유리로 보이는 풍경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뭔가 도로가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행인들은 휴대폰으로 뭔가를 찍고 있었고 입을 틀어막고 어딘가를 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쪽을 나도 봤다가 그만 깜짝 놀랄만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교통사고였다. 앞 부분이 완전히 찌그러진 승용차, 분리되어 차도에 나뒹구는 번호판, 역시 앞부분이 손상된 버스, 쓰러진 오토바이, 뽑혀버린 정류장 표지판, 그리고... 사람이 두 명 누워 있었다. 구급대가 오기 전이었는지 구조대원은 보이지 않았고 시민들이 그 사람 둘을 에워싸고 있었다. 몇몇은 쓰러진 사람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 듯했다. 누워 있는 사람들은 의식이 없는 듯 꼼짝하지 않았다. 정말 끔찍하여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뒷자리에서 같은 것을 봤을 아이는, "엄마 오늘 외식 못하겠어요. 밥이 안 넘어갈 것 같아요."라고 했고 나 역시 운전하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고 현장과 누워있던 사람들이 계속 떠올랐다. 괜한 걸 봐버렸다고 생각하면서도 누워 있던 사람들의 무사를 간절히 바랐다. 저녁쯤 되어서야 지역 신문에 기사가 떴다. 4중추돌, 1명 사망 4명 중경상이라는 내용을 읽고 내가 사망자를 봤겠구나 하는 생각에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거길 지나가질 말 걸, 돌아서 유료도로로 갈 걸 깊이 자책했다.


그날 밤, 아이를 재우고 나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그 사고에 대해 검색하던 나는 사고가 발생했던 당시의 CCTV영상을 보게 되었다. 내 차선에 있던 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여러 대와 충돌했고 그 차에 추돌한 반대편 차 한대가 다시 내 차선쪽으로 중앙선을 침범하는 대형 사고였다. 영상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와 아이는 그 끔찍한 사고를 재수 없게 본 게 아니라 굉장히 운 좋게 피했다는 것을. 구급대원들이 도착하기 전이었으니 우리는 불과 한 10분 늦게 그 곳을 지나고 있었으며 10분 일찍 내 차가 거기 있었더라면 지금 우리가 안전할 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날 평소보다 그 곳을 살짝 늦게 지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떠올랐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어딘가에서 잃어버렸고 변상할 위기에 처한 나는 그것을 찾으려고 아이를 다시 교실로 올려 보냈던 일을, 가기 전에 아이가 내 말을 바로 듣지 않고 몇 분간 실랑이를 했음도.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사고 순간 현장에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잡아뒀다는 것을. 그 순간 내 삶의 모든 사건들이 다 소중하게 느껴졌다. 내가 의도하고 계획한 것이든, 미처 계획하지 못한 것이든 상관없이 모두 다. 그리고 내 삶은 아직 넘기지 않은 달력의 어딘가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도.

그 날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나는 하루의 계획을 세우고 다이어리를 빼곡히 채운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 하기 전 계획을 잘 이행했는지를 변함없이 점검한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계획은 계획일 뿐, 내 하루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흘러가는 순간과 내 모든 시간을 더 애틋하고 소중하게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쌓인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픽업하는 이 지루하지만 별일없는 하루하루가 당연히 주어진 게 아니라 실은 놀라운 우연이 겹쳐져 만들어 낸 선물임을 이제 알았으니까.


반납이 하루 남은 오늘, 책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도서관에 반납 대신 변상을 하기 위해 똑같은 새 책을 구매했다. 아까운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지 뭐. 이것 역시 내 삶의 빛나는 한 조각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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