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꿈
h야, 나 어제 꿈꿨어. 아무래도 곧일 것 같아.
이런 기분쯤은 익숙하다. 평소처럼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시원한 물 한 잔을 꺼내 마시면 된다. 모든 꿈이 실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조금만 되뇌면 된다. 잘 잤냐고 묻는 애인에게 오랜만에 푹 잤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만 한다면 이런 기분쯤은 쉽게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대학교 입학식 날이 밝았다. 전날 동기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셔서 그런지 머리가 아팠다. 입시가 끝났다는 후련함과 일지망 학교에 합격했다는 기쁨으로 뒤섞여 평소 마시지 않던 술을 입에 댄 탓이었다. 그날 애인은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의 일상에 대해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입학식을 시작했다고 말하면 “잘 다녀와.” 입학식 뒤풀이를 왔다고 말하면 “잘 다녀와.” 애인과의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오고 가지 않았다. 연인과 타인 사이. 그 어디에도 우리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한 글자 차이지만 두 단어의 간극은 너무나도 멀었다. 뒤돌아가는 사람의 뒤통수가 점점 작아지는 것처럼.
나에겐 동갑내기 사촌 h가 있다. 대학교 기숙사 입사 이후 홀로 타지에 오게 된 나는 h에게 자주 전화를 걸었다. h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와썹 브로~.”라고 말하는 습관이 있다. "Whatssup bro." 직역하면 “무슨 일이야.” 나는 나의 안부를 묻는 그 말이 참 좋았다. 가끔씩 그 말이 듣고 싶을 때는 별 일이 없어도 h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날은 별 일이 있어서 h에게 전화를 건 날이었다. “h야, 나 꿈꿨어. 햇살이 정말 쨍쨍한 날이었는데, 정확한 날짜는 몰라도 일요일 오후 두 시쯤이란 건 알 수 있었어. 날씨는 너무 좋은데 기분이 무슨 헤어진 것처럼 우울하더라. 이거 뭔가 데자뷔 같아.” h는 조금 생각하더니 개꿈일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마음이 썩 편하진 않았지만, 이런 기분쯤은 익숙하니 평소처럼 시원한 물 한 잔을 꺼내 마시기로 했다. 모든 꿈이 데자뷔가 되지는 않으니 아닐 거라고 믿었다. 그럼 이런 기분쯤은 쉽게 떨쳐낼 수 있을 테니까.
꿈을 꾼 지 일주일 채 되지 않았을 때 애인은 내게 시간을 갖자고 말했다. 놀랍지는 않았다. 개꿈은 아니었네 딱 그 정도의 깨달음이었다. 꿈과는 별개로 애인과 나 사이가 며칠 새 완전히 기울었음을 체감하고 있었으니까. 애인은 미안한 기색을 드러내며 우리가 왜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어쩌면 헤어지자는 말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말이 그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에 뱉은 말이었다면.
결국 애인은 나의 전 애인이 됐다. 이미 한 번 예지한 일이라 그런지 “그랬구나, 알겠어.” 한 마디로 놓을 수 있었다. 기억이 선명한 꿈은 데자뷔가 된다는 말에 힘이 실리는 순간이었다. 햇살 좋던 일요일의 한 장면은 언제쯤 현실이 되어 내게 올까. 시간을 갖는 동안 나는 내 꿈이 틀리길 바라며, 한때 나의 꿈이었던 네가 내 꿈이 되지 않길 빌었다. 나의 의지와 데자뷔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곧장 h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헤어졌어. 개꿈은 아니더라.” “그럼 다른 꿈은?” 다른 꿈같은 건 없었다. 이를테면 애인과 다시 만나는 꿈같은 것. 그런 꿈은 꾸지 않았다. 앞으로도 꾸지 못할 꿈이었다. 내 말을 묵묵히 듣던 h는 동네 내려오면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