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퇴근길을 따라 걷다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겠다 결심한 여름, 실행에 옮긴 가을을 지나 겨울이 왔다. 따뜻한 겨울이었다. 소소한 데이트들이 엄마와 나, 나와 아빠 사이를 훈훈하게 데운 덕분이었다.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꼽아보면 아래와 같다.
눈 오니까 따끈한 크림파스타가 먹고 싶네
’젊은 애들 먹는 거‘에 이은 의외의 메뉴 선택이었다. 장군님이 양식을 먼저 찾은 건 처음 봤다. 토마토소스도 아닌 크림이라니. 이유가 더 놀라웠다. 오랜만에 먹고 싶다, 도 아닌 눈이 와서. 몇 번을 되물어도 같은 대답이었다. 그냥 눈이 오니까.
크림처럼 하얀 눈을 맞으며 찾아간 식당은 아담하고 따뜻했다. 키오스크로 주문한 크림 파스타는 기본으로 제공되는 모닝빵과 샐러드가 비워지는 타이밍에 맞게 나왔다. 크림소스와 파스타 면에 물릴까 봐 주문한 베이컨 필라프도 함께였다. 데이트마다 반전미를 보여주기로 결심한 건지 엄마의 원픽은 크림 파스타였다. 데이트를 나와 식사를 할수록 느낀다. 이제 어디 가서 엄마의 입맛을 꿰고 있다는 호언장담을 하긴 글렀다고. 내가 그동안 정의했던 엄마는 집밥을 먹고,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보는 모습에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엄마’ 고장군의 모습만 보고 고장군의 모든 걸 안다고 속단했던 것이다.
목욕탕과 불가마의 중간 정도까지 컸나 보다
왜 2차 성징이 오면 몸은 자라고 마음은 닫는 걸까? 그 대표적 증상이 엄마와 목욕탕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도 어릴 때 자주 가던 목욕탕의 구조가 생각날 정도로 우린 등 좀 꽤나 밀어주던 사이였다. 성장판이 영업 종료를 알리고 몸의 형체가 변하지 않을 무렵, 목욕탕을 찾지 않았다. 어린 우리의 때를 벗긴다는 핑계로 목욕탕을 즐겼던 엄마 역시 발걸음을 끊었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서가 아닌 팔짱을 끼고 입장한 목욕탕은 그 시절에 비해 굉장히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넓게 탁 트이고 쾌적해서 마치 뷔페 같았다. 브로콜리 수프 색에 몸을 담가야 할지, 단팥죽 색에 지져야 할지 고민됐다. 찜질방 축소 버전의 불가마가 목욕탕 안에 빌트인 되어 있기도 했다. 뜨거운 물에 푹 담그는 시원함을 아는 어른이 된 나는 엄마만큼 탕을 즐겼다. 초록색 때수건이 아닌 바디 스크럽 제품으로 우아하게 각질을 벗겨낸 우리는 찜질방 층으로 올라갔다.
바로 정정한다. 목욕탕을 즐길 줄 알지만 불가마는 아직 무리인 ‘어른이’라고. 닭으로 태어나서 치킨으로 죽는 것이, 백숙으로 죽는 것보다 오만 배는 낫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기름에 잠깐, 바짝 튀겨지는 것이 압력솥에 은은하고 지루하게 삶아지는 것보다 괜찮은 것 같다. 불가마에서 모공이 열리고 노폐물이 제 발로 나가는 걸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일은 백숙이 되는 과정 그 자체였다. 뛰쳐나가려는 나를 주저앉히는 엄마는 사골 백숙이 되고도 남을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여러 의미로 아직 멀었음을 느꼈다.
백화점만큼이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은 드물다. 12월에 들어서자마자 주변 나무가 모두 트리로 변한다. 매년 바뀌는 크리스마스 데코 덕에 젊은 연인들이 일부러 찾아가 인증샷을 남기는 명소가 되기도 한다. 백화점에서 20대부터 50대까지 근무해 온 엄마의 크리스마스는 어땠을까? 부끄럽게도 나는 그해에 들어서야 이런 생각을 했다. 크리스마스를 포함한 연말이 대목인 직장이라 정신없이 바빴을까? 크리스마스에 늘 출근했던 것 같은데 많이 아쉬웠을까?
당시 남자친구와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였지만 이브 저녁과 당일 점심을 함께하는 것으로 미리 합의했다. 모두가 크리스마스의 하이라이트를 즐기는 시간, 엄마의 직장으로 향했다. 마감 후, 조명이 꺼진 백화점 앞에서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가 퇴근했다. 미리 언질은 했지만 진짜 나타나자 놀란 눈치였다. 항상 혼자였던 퇴근길에 딸이 오자 웃기다며 킥킥댔다. 팔짱을 쏙 끼고 날 데려간 곳은 근처 돼지갈비 집이었다.
이브 저녁으로 스테이크에 해산물 요리를 먹었던 나는 그 상황이 은근히 재밌었다. 회식으로 가봤던 갈빗집이 너무 맛있었다며 신나게 날 데려온 엄마, 어쩌면 당연하게도 손님 하나 없던 돼지갈빗집. 오히려 당일에는 손님이 많지 않아 심심했다며 재잘재잘 풀어놓는 이야기, 배차간격을 꿰고 있어 이리저리로 이끄는 손을 잡고 따라간 퇴근길. 크리스마스 최고의 이색 데이트였다.
아담하고 소박한 파스타집, ‘파치’
가성비가 좋고 맛은 무난한 편.
이색 데이트하기 좋은 찜질방, ‘북수원 온천’
연인과 이색 데이트하기도 좋고, 부모님과 편안한 시간을 보내기도 좋다.
리모델링을 거쳐 시설이 쾌적하다. 발리 컨셉의 휴식공간, 코인노래방이 있는 놀이공간, 레트로 컨셉의 수면공간, 치맥을 할 수 있는 식당 등.
주말에는 방문 인파가 꽤 몰리니 가능하다면 평일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계절감이 느껴지는 데이트를 준비해 보자. 언제든 할 수 있는 데이트와 여운이 다르다. 분명 이듬해 같은 계절이면 함께 되새길 수 있는 추억이 될 것이다.
-부모님의 퇴근길을 마중 나가보자. 몰랐던 일상을 공유하며 나오는 이야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