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웜스 Sep 12. 2024

고추장 없는 비빔밥

개체성의 소중함


복잡하고 화려한 것에 질릴 때가 있다. 자극적이고 입 안에서 계속 맴도는 감칠맛이 좋아 갖은양념과 향신료들을 추가해 먹는 사람도 가끔은 그 양념이 모든 걸 덮어버리는 느낌이 싫어지기도 한다. 많은 재료의 개체성을 인정해 주는 음식, 그런 맛이 진득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다.


비빔밥은 그런 의미에서 소중한 음식이다. 내가 어릴 때 가장 자주 먹었던 음식이기도 하다.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젓갈이 많이 들어간 시원한 배추김치, 집에 남은 반찬들을 넣어 비벼서 먹었다. 늘 그래왔어서 아무렇지 않게 비빔밥을 자주 먹었는데 어느 날 친구가 맨날 비빔밥을 먹는다며 한마디 하더라. 그렇게 먹으면 맛있어?라고 물으며 조금은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봐서 조금 민망했다. 비빔밥은 할머니와 엄마가 해준 김치와 반찬들을 싹싹 긁어 끝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나하나의 반찬이 끝까지 소중하게 음식에 활용되는 그 알뜰함과 소박함이 좋았다.


그때그때 다른 반찬이 들어가기 때문에 비빔밥의 맛은 정말 무한대이다. 어느 날은 고소한 맛이 나고 어떤 날은 구수한 맛이 났다. 엄마는 자주 “요 반찬이랑 요 반찬이랑 넣어서 비벼먹으면 맛있어. 엄마는 오늘 저녁 그렇게 먹어야겠다!”라고 말씀하시며 추천 조합을 귀띔해주시기도 했다. 집에서 먹는 비빔밥은 늘 창의성을 요하는 요리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빔밥은 다른 비빔밥과 비교조차 불가능한 ‘할머니표 나물 비빔밥’이다. 똑같은 나물과 똑같은 참기름으로 집에서 만들어도 절대 그 맛이 안 난다. 할머니 집의 공기와 할머니 손맛과 할머니 집의 오래된 냉장고에서 지냈던 반찬들이어야 한다. 또 다른 비법은 바로 고추장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다. 고추장이 안 들어간 비빔밥은 앙꼬 없는 절편이라며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추장이 없어서 각자 재료의 개체성이 입안에서 더 확연히 드러난다. 버무려진 갖가지 반찬들 속 은은한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이전 01화 할머니 집 냄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