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 ‘휘도’ 보정하기 #4
[집 냄새 luminance +4]
여행을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한 독특한 방법 중 하나는 여행 내내 같은 향수를 뿌리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그 향만 맡아도 여행지에서의 바람과 공기가 다시 떠오른다. 후각은 우리 감각 중에 가장 강력한 기억이라 몇 분만 맡아도 쉽게 둔감해지지만, 모순적이게도 가장 예민한 감각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가장 둔감해진 향을 꼽으라 하면 '집 냄새'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친구의 집에 들어서면 평소 그 친구에게 나던 향이 온 집안에 퍼져있는 걸 인지하게 된다. '우리 집 냄새는 어떤 냄새지?' 명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낯선 공간에서 자신의 집 냄새를 고르라고 하면 모든 사람이 단번에 골라낼 수 있다.
참 오묘한 향이다. 인위적인 향수나 디퓨저로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섬유유연제 옷 냄새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평소 자주 먹는 음식 냄새, 자주 사용하는 바디 워시 냄새, 동물을 키우는 친구라면 특유의 꼬순 냄새가, 어린 동생이 있는 친구에게는 아기 파우더 냄새가 섞여서 난다. 영화 기생충에서 '다송'이가 '기택'과 그 아내의 냄새를 맡고는 똑같은 냄새가 난다고 말해 우리 모두가 흠칫했던 것처럼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의 냄새는 우리에게 생각보다 아주 깊게 스며있다.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 가던 날, 짐을 모두 빼고 나서 텅 빈 공간을 혼자 둘러봤다. 10년을 살았던 익숙한 공간이었음에도 낯설었고 어색했다. 우리 집 냄새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한 공간에서 밥을 해 먹고, 빨래를 하고, 땀 흘리고 몸을 씻어야 비로소 '집 냄새'가 그 공간을 채우는 것임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집 냄새는 단순히 그 공간의 향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간과 기억,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향인 것이다.
후각으로 느껴지는 사람의 이미지도 치장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인위적인 향 속에서 묻힌 날 것의 집 냄새, 그저 지나치기 쉬운 집 냄새는 우리 자체를 대변하는 향이다. 매일 생활하는 공간에서의 향은 쉽게 둔감해져 지각하기 어렵지만 낯선 사람들 속 내 사람을 찾을 수 있게 하고, 외로운 타지에서 묘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향을 만들어내는 그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흔적조차 찾기 힘든 희소한 향. 그게 바로 '집 냄새'다.
할머니 댁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렀을 때 할머니께서 내 바지를 하나 빨아주셨다. 서울에 도착해 얼마 뒤 가방을 열어 그 바지를 꺼내자 할머니 냄새가 방안 가득 퍼졌다. 한참을 힐링하는 표정으로 바지를 들고 있자 동생이 수상하다는 듯이 날 쳐다봤지만 아무렴 어때. 엄마에게 이 바지는 당분간 절대 빨지 마라고 얘기한 뒤 비닐봉지에 곱게 넣어 한동안 입지 않았다. 앞으로 할머니 댁에 가서는 손수건 하나라도 꼭 빨래통에 몰래 넣어 빨아와야겠다는 어이없는 다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