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 ‘휘도’ 보정하기 #3
[우리 동네 luminance +3]
나의 고향은 부산이다. 부산에서 왔다고 하면 흔히 듣는 말이 있다. "사투리 아예 안 쓰시네요?" 혹은 "부산에 살 때 바다 자주 갈 수 있어서 좋으셨겠어요." 그러면 나는 한마디 더 덧붙인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살았어요." 그럼 상대방의 얼굴엔 미묘한 실망이 스치며 "그게 무슨 고향이냐"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속으로 분노한다. 왜 고향이 아니란 말인가? 비록 내가 부산에 살았던 기간은 10년 남짓이지만, 그때 우리 가족이 살았던 곳은 내가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아꼈던 동네다.
언덕 위에 위치했던 우리 집은 바다와는 거리가 멀었다. 창문으로는 바다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언덕 꼭대기에 있어 놀이터와도 멀리 떨어진 꽤 외진 곳이었다. 누군가 우리 집만 보고는 이곳이 부산인 줄 짐작도 못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우리 동네를 사랑했던 건, 그곳에 있던 몇 가지 사소한 것들 때문이었다.
집 앞에는 항상 고소한 흙냄새가 나던 작은 도자기 공방이 하나 있었다. 가끔 그곳에 가서 친구들과 도자기를 배우기도 했는데, 열심히 빚었던 컵들은 지금 보면 울퉁불퉁하고 모양도 참 엉터리지만 그런 투박함이 오히려 매력있어 보이기도 하다. 물레를 돌릴 때 손끝에 느껴진 흙의 촉감과 조금 서늘한 공방의 공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또, 야외 주차장에는 늘 나를 반겨주던 공벌레 친구들이 있었다. 벌레를 무서워하는 나지만 왠지 모르게 공벌레는 귀여워 보였다. 엄마와 함께 자주 갔던 목욕탕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터였다. 어린 나의 눈에 그곳은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들의 목욕탕 같았다. (실제로 아시아 최대 규모의 목욕탕이라 엄청 크다ㅎㅎ) 그곳에 들어가면 물이 흐르는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웅웅 울려 마치 꿈같이 몽롱하기도 했다.
딸 부잣집이라며 순대를 넉넉하게 담아 식지 말라고 신문지에 싸주셨던 단골 순대집, 그리고 집 근처 대학교 매점에서 아빠와 사 먹던 시원한 메로나까지. 그런 사소한 것들이 모여 나의 고향, 내가 사랑하는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요즘은 각자가 사는 '동네'에 대한 애정이 예전만큼 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생활 반경이 넓어지면서 집은 잠만 자는 곳이 되었고, 쉬는 날에는 저 멀리 핫플레이스에 가느라 동네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가 사는 동네를 있는 힘껏 아껴주는 사람이 거의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들이다. 인천의 한 마을을 출사 하던 중 발견한 풍경은 마치 뮤지컬의 한 장면 같았다. '이렇게 알록달록 예쁘게 빨래를 걸어놓은 사람은 누구일까?', '주차 표지판에 이런 깜찍한 표정을 붙인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동네를 사랑하고 소박하게 마나 가꾸는 사람들이겠지. 그런 마음들이 모여 이 마을의 뮤지컬 같은 풍경을 만들어냈을 테니까.
돈과 현실적인 제약이 많은 것들을 뒤바꾸어 놓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잔잔하고 소박한 행복을 지켜줄 수 있는 우리 동네를 마구 아껴주고 싶다. 내가 사는 이 마을이 조금 더 오래 내 곁에 남아주길, 단골 맥주집과 카페가 사라지지 않길 바란다. 나중에 내 아이들과 함께 이 동네를 산책하며 자랑할 수 있도록.
'쓸데없는 일처럼 보여도 한 사람이 이 동네의 좋은 점을 기억하면 나중에 너에게 몇 배로 돌아올 거야.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말이지' (바다의 뚜껑 中)
+ 우리 동네를 아끼기 위한 소박한 버킷리스트
-우리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꼬치와 맥주를 파는 곳 찾아내기
-공원 잔디밭에 앉아 짜장면 먹기 (짜장면이 최애 음식이라 그렇다.)
-동네 카페에서 책 읽는 척하면서 옆 테이블 아주머니들이 뜨시는 뜨개질 목도리 구경하기
-초등학교 하굣길, 학교 앞 문방구에서 초등학생들 틈에 끼여 불량식품 하나 사 먹기
-동네에서 가장 단풍이 예쁜 나무가 있는 곳과 가장 은행 냄새가 고약한 곳을 찾아놓기
-눈이 쌓였을 때 삽과 양동이를 들고 어디에 눈사람을 만들 건지 미리 장소 물색하기
-명절 전날, 동네 목욕탕에서 말끔하게 목욕한 다음 바나나 우유 마시기
-동네 두부집에서 파는 콩물과 채소 가게에서 파는 오이로 콩국수 만들어 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