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 ‘휘도’ 보정하기 #1
+휘도(luminance) 보정하기
휘도는 '광원을 특정 방향에서 볼 때, 얼마나 밝아 보이는가를 나타내는 값'이다. 간단히 말해 ‘눈부심의 정도’이다. 사진에서 휘도를 높이면 빛이 닿지 않아 어둡고 가려졌던 부분이 다시 형체가 드러나 밝게 보인다. 컴컴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골목의 모습인 줄 알았는데 휘도를 높이는 순간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람의 정겨움이 드러나는 것처럼.
출퇴근 버스, 사람들이 풍기는 집 냄새, 급하게 먹었던 아침밥. 평범한 일상 속 순간순간들과 느껴지는 갖가지 감각들은 마치 흐린 필터를 씌운 것처럼 매우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 순간들의 휘도를 보정해 보면 밝게 형체가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몰랐던 다정함이, 우리가 놓쳤던 행복이, 또는 묘한 먹먹함이.
[아침밥 luminance +1]
감자볶음과 된장찌개, 그리고 가끔 계란말이와 무생채.
이것들은 아빠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요리들로 구성된 아침 메뉴였다. 어릴 땐 아빠가 해준 아침에 불만이 많았다. TV 속 예능이나 드라마에서는 아침에 고등어도 굽고 고기도 먹던데, 매번 똑같은 메뉴가 불만이었다.
특히 '감자볶음'은 날마다 맛의 기복이 심했다. 어떤 날은 기름이 촉촉하게 코팅된 맛있는 감자볶음이었지만, 어떤 날은 삶은 감자였고, 또 어떤 날은 감자튀김이었다. 촉촉한 감자볶음은 때깔부터 달랐다. 채 썬 감자가 자세를 곧게 유지한 채 유광 피부를 뽐냈다. 반면 삶은 감자는 심하게 건조해 보였고, 감자튀김은 너무 바삭해 예민해 보였다. 맛 평가만큼은 냉정한 가족들은 감자볶음이 맛있게 만들어진 날에는 그릇을 싹싹 비웠지만, 맛없는 감자볶음은 며칠간 냉장고에 틀어박혀 희망고문을 받다가 결국 상해버리고 말았다.
머리가 자라 이제 가스불도 쓰고 칼질도 혼자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나는 부엌에서 주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혼자 밥을 차려 먹고 싶어진 것이다. 특히 감자볶음에 질린 나는 아침에 내가 먹고 싶은 메뉴로 간단히 차려 먹기 시작했다. 식탁 위에는 여전히 아빠가 만들어 놓으신 감자볶음이 있었지만, 그냥 못 본척 지나갔다. 그 감자볶음은 식지 않게 랩으로 잘 포장되어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아빠가 부엌에서 감자볶음을 만드시는 모습을 우연히 봤다. 화구 앞에 서 있는 아빠 옆에는 아빠가 자주 보시는 레시피 북이 하나 펴져 있었다. '2천 원으로 밥상 차리기' 제목은 그랬던 것 같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그 레시피 북에는 검은색 볼펜으로 쓴 글씨가 곳곳에 적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맛있는 요리가 나왔던 날 어떤 재료를 넣고, 어떻게 조리했는지를 기록해 두신 것이었다. 채 썬 감자를 프라이팬에 볶기만 하면 되는 무심한 요리인 줄 알았던 감자볶음에서 아빠의 서툰 다정함을 느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빠는 간단한 요리를 할 때도 그 레시피북을 옆에 펼쳐 놓고 계셨던 것 같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마지막에 나오는 문구가 하나 있다. ‘코모레비’(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는 그 순간에만 존재합니다'라는 문구다. 일상 속 무심히 지나쳤던 감자볶음과 같은 존재들. 그 존재들은 사실 빛나는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존재들이지만 그 순간에만 머무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늘 '다음', '새로움'을 생각하는 사회 속에서 그 익숙한 순간과 존재들은 그저 빠르게 스쳐 지나가버리고 만다.
사진에서 '휘도'를 보정하는 마음가짐을 닮고 싶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사진 속에서 빛을 조정해 숨겨진 무언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스쳐 지나가버릴 수 있는 순간들을 꼼꼼히 묶어 의미 있게 만든다는 점이 참 낭만적이다. 아침에 대충 조미김에 밥을 싸서 "이거라도 먹고 가!"라고 말씀하시며 엄마가 입에 넣어준 김밥, 식탁 위 랩이 씌워진 감자볶음. 코모레비가 그 순간에만 존재하듯 아침밥에 담긴 마음도 천천히 곱씹지 않으면 그저 빠르게 소화되어 버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