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복된 새해>에 나타난 소통
김연수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는 “다 쓰고 몇 달이 지난 뒤에야 그즈음 한참 번역하던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라고 언급했듯이, 카버의 「대성당」과 비슷한 상황을 소재로 하고 있다.
「대성당」에서 시각장애인을 통해 소통과 화해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듯이, 이 작품 역시 어떻게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신형철의 해설에 의하면, 소설 뒷부분에서 인도인이 코끼리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대성당」에서 화자와 맹인이 대성당을 함께 그리는 장면에 바치는 오마주이지만 여기서 밝혀지는 진실은 인도인이 무척 외롭다는 사실뿐 아니라 내 아내가 늘 아이를 원해왔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미 「대성당」이 있음에도 이 소설이 또 씌어질 필요가 있었던 까닭이 이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에도 부부가 등장한다.
아내를 찾아오는 손님에 의해 이야기가 시작되고 화자인 남편은 그의 방문이 달갑지 않다는 점도 「대성당」과 동일하다.
단지 아내가 부재중이며 아내를 찾아오는 손님이 장애인이 아니라 외국인(인도인)이라는 점,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피아노를 조율하기 위해서라는 사실 등이 다르다고 하겠다.
'사트비르 싱'이라는 이름의 이 인도인은 펀잡 출신으로 화자는 그때까지 ‘펀잡사람은커녕 인도사람도 만나본 일이 없었’으며 동시에 ‘그렇게 턱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을 쳐다본 일도, 그렇게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을 잡아본 일도’ 처음이다.
따라서 「대성당」의 화자가 시각장애인의 방문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처럼, 이 작품의 화자도 한국말이 서툰 인도인을 맞아야 하는 사실에 ‘황당’해 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의 경우 시각적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외국인의 경우는 언어로 인한 소통장애를 겪게 된다.
이 작품에서 인도인은 화자의 기대보다 한국어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외로움뿐 아니라 아내 혜진의 외로움까지 이해시키기 전까지 인도인과 화자 사이에 교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화자와 아내의 관계는 「대성당」에 비해 원만해 보이지만 각각 외로움을 이해받지 못함으로 비롯된 문제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아기를 원했지만 아기가 없는 현실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 상대방의 반응에 서로 상처 입으며 외로움은 더욱 깊어만 가고 있는 것이다.
피아노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서운함을 노출시키는 장면이다.
화자는 피아노를 그냥 주겠다는 광고를 무가지에서 읽고 광고 낸 사람을 찾아가 어렵게 피아노를 운반해 오지만 아내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피아노’라고 하면서 이 피아노를 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한다.
화자는 아내의 이러한 반응을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아내는 내가 왜 저 피아노를 여기까지 가져와야만 했는지 이해했을까?
완전히 이해한 것이라면, 어떻게 내게 저건 아무런 쓸모도 없는 피아노라는, 그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일까?”라는 아쉬움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아쉬움은 저녁마다 아내가 한국어를 가르치느라 집을 비울 때 홀로 남아 느끼는 외로움과 합쳐져 아내와 ‘나’ 사이의 소통은 더욱 어긋나게 된다.
그래서 아내가 인도인과 친구가 되었다는 얘기에 “그래서 날 더러 어쩌라고?”라는 반응을 보이고 아내 역시 남편의 말에 “당신더러 어쩌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건 잘 알잖아, 그치?”라고 답한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 사이는 소원해지고 아내는 남편 대신 인도인과 이야기를 주고받게 된 것이다.
이 부부에게는 10여 년 전 특별한 여행의 추억이 있다.
일본 홋카이도의 작은 도시 오타루로의 이 여행은 즐거운 여행이 아니다.
여행 갈 처지가 아님에도 대출을 받으면서까지 떠난 점, ‘이별여행’이라 칭한 점으로 미뤄 보아 아마도 아기를 잃고 난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떠난 것으로 짐작된다.
그곳에서 화자는 ‘용서’라는 말을 떠올린다. “먼 훗날의 누군가를, 혹은 나 자신을 지금의 내가 용서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의 경우는 어떨까? 먼 훗날의 나라면 지금의 나를 용서할 것인가?”
아기는 이들에게 큰 의미가 있다.
홋카이도 여행 이후 10여 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아기가 없으므로 아기에 대한 열망은 더욱 크다 하겠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마음을 털어놓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지 오래이고, 그러다 보니 서로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어긋나 있는 이들의 관계가 잘 드러나는 삽화는 피아노에 관한 장면이다.
피아노는 ‘나’의 로망이지만 아내는 그렇지 않다.
‘일 마치고 집에 돌아가 대문을 열라치면 창문너머로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는, 그런 풍경’을 꿈꿔왔던 남편과는 달리, 혜진에게 피아노는 ‘고통’이다.
체르니 40번까지 들어가긴 했지만 플랫과 샵이 고통스러웠으며 손가락이 아파서 건반을 두들길 수가 없어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 끝에 아내는 울음을 터뜨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기생각 때문이다.
곧 아내에게 피아노는 아기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가 낡은 피아노를 얻어 왔을 때 아내의 반응이 냉소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를 이해 못 한 ‘나’는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다.
아내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의문을 갖지만, 화자 역시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자신이 아내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무신경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말이 많은 사람’이고 ‘잠자코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닐까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내가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은 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내는 자신의 속마음을 남편이 아닌 외국인에게 털어놓는 것이다.
인도인은 한국에 온 지 삼 년이 넘었지만 오 개월 전부터 한국어 강좌에 다니기 시작해 한국어가 아직 서투르다. 그래서 화자는 아내와 인도인이 ‘이야기를 통해’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의 한국어 실력으로 아내의 많은 이야기를 다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곧 언어에 의한 소통만이 전부가 아님을 화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언어능력이 부족하면 서로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는 것이 화자의 생각이라면,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의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도인과 혜진의 관계가 보여준다고 하겠다.
언어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림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
깊이 있는 대화가 어려워지자 인도인이 그림을 그려 소통을 시도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아기일 때 숲 속에서 홀로 잠자고 있다가 깨어나 울고 있는데 코끼리가 나타나 곁에서 지켜 주었다는 이야기를 인도인은 그림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혜진이 영어로 “Always I wanted a baby. I wanted to be the elephant like this. I am alone. I feel lonely.”라고 말했음을 알려준다.
‘나’는 비로소 ‘혜진의 마음, 혼자입니다’라는 말의 뜻을 깨닫고 혜진의 외로움을 이해하게 된다.
화자와 혜진처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대화가 어려운 관계가 있다면, 인도인과 혜진처럼 언어능력이 부족하더라도 소통이 가능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교감을 통해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다음 예문이 잘 보여준다.
그런 경우 언어능력이나 단어의 뜻 같은 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