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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vs 너 가 아닌 우리 vs 상황

by NINA

혼자서 무언가를 감당해야 할 때면 어김없이 조급해졌다.

잘하고 싶었다.

내 노력이 오해받지 않길 바랐다.

그 마음이 점점 무거워질수록 누군가가 괜히 밉게 느껴졌다.


그날도 그랬다.




유독 검사가 많았다.

대기 환자 수는 줄지 않았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굳은 표정의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다.


그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내 어깨는 더 무거워졌다.

검사를 조금이라도 빠르게 끝내고 싶어 속도를 끌어올렸다.


근무복은 땀에 젖었고 머리는 헝클어졌고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낼 틈조차 없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잔뜩 인상을 쓴 중년여성이 거칠게 말문을 열었다.


“진짜 너무하네요. 뭘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요?”


말투는 날카롭고 얼굴엔 짜증이 선명했다.

나는 지친 마음을 숨기며 조용히 자리를 안내했다.


“오늘 검사하러 오신 분이 많네요.”


하지만 그녀는 검사 내내 모든 걸 귀찮은 듯했다.
팔을 드는 동작에도, 몸을 옮기는 순간에도 짜증이 묻어났다.


“이런 건 왜 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아프기만 하고, 이거 하다가 암 생기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 통증이 느껴지자 그녀는 크게 고함쳤다.


“아아악!! 왜 이렇게 아파요?!”


순간 나도 화가 날 뻔했다.

하지만 말 대신 모니터를 다시 봤다.


“유방 안쪽까지 보려면 깊이 눌러야 보여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정확히 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세요?”


차가운 말투였다.


그녀는 짧게 답했다.


“아, 하세요 그럼.”


검사 도중, 내가 모니터를 확인하려 그녀에게서 몇 발짝 떨어졌을 때 혼잣말이 들렸다.


“아씨, 진짜 아파...”


그녀가 나간 검사실에서 나는 혼자 남아 고개를 숙였다.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의료 현장은 매일 전쟁 같다.

한쪽은 아픔과 두려움으로 다른 한쪽은 책임과 소진으로 싸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며 서로를 향해 말한다.


아파요!

(당신이 잘못했어요)


참아야 합니다.

(당신이 잘못했어요)


내가 옳다는 말속에는 자연스럽게 당신이 틀렸다는 의미가 숨어 있었다.




그날 한 명의 또 다른 환자가 나의 시선을 다시 들게 했다.


“선생님~ 천천히 하세요. 괜찮아요 :)”


검사 화면을 보며 쉴 새 없이 설명하던 내게 그녀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미소를 건넸다.


그 순간, 숨 막히던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그녀가 떠난 뒤에도 그 짧은 한마디는 오래도록 내 안에 머물렀다.




우리는 갈등의 모든 순간을 ‘나 vs 너’의 구도로만 바라봤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지치고, 원망하고, 멀어졌다.


하지만 한 발만 물러서서 ‘우리 vs 상황’으로 보았다면 어땠을까.


조급한 나, 두려운 그녀.

우리는 같은 전장을 견디는 사람들이었다.

함께 전장을 견뎌야 할 동료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를 향한 칼 대신 이런 말을 건넬 수 있지 않았을까.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아프죠? 너무 잘하고 있어요.”
“감사해요.”
“힘내세요.”


함께 가기 위해 서로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마음.


그녀의 한마디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


말보다 따뜻한 틈이 전장의 공기를 바꾼다.


적의 군대를 파괴하는 것은 차선의 방법이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이다.

― 손자병법, 「모공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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