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청년기 4-
-새내기 교사 시절-
준희는 중학교 가정과목 교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요리 실습도 일주일에 한 번은 해야 했다. 실습 첫날은 볶음밥이었다. 20세가 넘도록 준희는 김장 한번 식구들과 함께 담가 본 적이 없었다. 머리만 감고도 휘청일 정도로 몸이 약해 집에서 어떠한 가사도 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준희를 낳은 후 몸조리를 잘 못해 생긴 해산바람으로 늘 아파 누워 지내므로 집에는 항상 가정부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대학에 다닐 때도 당시 군사독재정권에 항의하는 시국 데모가 매일 이어져서 눈이 따가워 거리에 나가기조차 어려운 어수선한 시기라 정상수업은 늘 휴강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볶음밥은 먹어만 봤지 해본 적이 없는 준희는 책을 참조하며 열심히 양파와 당근 등 각종 재료들을 가로 세로 약 1센티로 자르라는 명령?을 내리며 열심히 팀으로 묶어 실습하고 있는 학생들 사이를 신나서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인가??
시골에 있는 중학교라서 실습이 끝나면 전 교직원들에게 학생들이 실습한 음식을 대접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970년대는 가스도 전기도 요리기구에 사용하는 시기가 아니었다. 서울 등 대도시는 주로 연탄불을 사용했고 그나마 잘 사는 집은 프로판 가스를 사용했다. 시골은 으레 장작불로 밥을 짓거나 연탄을 사용했다. 큰 드럼통을 잘라 만든 화덕에 큰 솟을 얹고 밥을 하는데 그만 밥이 타기 시작했다. 뚜껑을 열어 보니 분명히 위에는 생쌀인데 밑에서는 타기 시작한 거다. 탄내와 연기가 온통 사방팔방에 진동한다. 준희는 이유를 몰라 당황해서 부랴부랴 여자 행정 교직원에게 달려갔다.
“아니, 위에는 생쌀인데 밥이 왜 막 타요. 왜 그래요??”
급해서 말까지 더듬으며 물으니 여직원이 말한다.
“많은 양의 밥을 할 때는 물이 끓을 때 쌀을 넣어야 하는데, 그렇게 했나요?”
‘아차, 그걸 몰랐구나. 처음부터 쌀과 물을 넣어 끓이니 밑에는 타고 위는 생쌀이었구나.’ 준희는 난생처음 그토록 부끄럽고 미안하고 죄송한 적이 없는 듯했다. 가정선생 준희의 무지로 50여 명의 아이들도 10여 명이 넘는 교직원들도 그날 점심은 굶어야 할 판이다. 준희는 부랴부랴 라면을 대량 사 오게 해서 늦은 오후에 겨우 점심 대신 라면을 먹게 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경비 청년직원이 라면 심부름을 가면서 준희를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신기한 듯 쓴웃음을 지었던 모습에 준희는 더더욱 창피함으로 어쩔 줄 몰랐다.
실수 연발의 교사 생활이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늘 마주하는 즐거움에 묻혀 지나가지만 여전히 준희의 머릿속은 뭔가 걸려있는 것처럼 불교에 관한 물음이 문득문득 솟구쳐 의문을 풀고자 하는 열망이 눈덩이처럼 뭉쳐져 갔다.
준희의 부모도 모두 불교 신자였으므로 늘 아침저녁으로 독경을 했지만 그 내용이 이해하기 어렵고 그저 노인들이나 다니는 종교 정도로만 생각하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준희는 이제 더 이상 불교가 노인들의 염불정도가 아니라 심오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고영순이라는 귀한 인연을 통해 얻었으니 이제 그 의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준희는 중학교 발령지로 가기 전에 책방에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한 권 사서 가방에 넣어갔고 이제 그 책을 펼치고 싶어 졌다. 마침내 싯다르타의 생애를 다 읽고 난 준희는 더욱 불교에 매료되어 이제 붓다의 사상을 더 알지 않으면 못 배길 것 같은 절박함까지 느꼈다.
심천 중학교에서는 함께 부임하게 된 영어과목 선생님이 있었다. 거기서 처음 만난 김혜경 선생님은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고영순과 달리 매사 적극적이며 아주 자부심이 강하고 당당했다. 부친이 어느 대학의 교수라고 했다. 우리는 토요일이면 으레 서울 집으로 가기 바빴다. 그곳 아름다운 시골 정취를 느끼며 지낼 수도 있었는데, 20대 초반이었던 준희와 혜경은 주말이면 열심히 서울로 향했다. 집 밥도 먹고 싶고 가족도 만나는 것이 그 나이에 최우선 순이었다. 기차나 고속버스로 장거리를 오가며 긴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되자 준희는 속이야기를 꺼내 놓으며 불교를 더 많이 알고 싶다고 했다. 혜경이 그런다.
“그러면, 동국대학교에 불교학과를 들어가요. 학사 편입이라는 것이 있으니 3학년으로 편입하면 돼요.”
‘이게 웬일인가?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준희는 기대와 기쁨에 들떠 1년 만에 사표를 내버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학사편입을 했다. 당시 학과 학생수는 10여 명 정도였다. 그 가운데 여학생이 준희 포함 3명이다. 일찌감치 인생이 무엇인가 라는 철학적인 물음에 답을 얻고자 모인 학과 학생들은 저마다 특이한 괴짜들이었다. 사색에 잠겨 잔디밭에 앉아 있기 일쑤라 거나, 인생을 시로 읊는 학생, 승려에서 환속한 학생, 남자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여학생 등등. 또한 준희처럼 대학을 졸업한 후 사회생활을 하다가 학사 편입하는 학생들이 각 학번마다 꼭 한 두 명씩이 있었다.
학과생들은 방과 후 한데 어울려 학교 근처 장충동 막걸리 집으로 가서 술을 마셔라 부어라 하며 자신들의 생각들을 펼쳐 놓으며 어떻게 생각하는가 서로 묻고 답하며, 혹은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등의 허세 아닌 허세도 부리면서 지금까지 와는 전혀 딴판인 세상이 펼쳐졌다. 그 분위기는 앞으로 전개될 준희 인생에 새로운 판을 암시하는 듯했다.
-철학에 미치다-
그 새로운 환경은 오로지 한 가지 의문만을 풀어 보고자 작정한 준희에게는 더 이상 낯설지 않았고 오히려 편하며 익숙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아 마시듯이 준희는 철학에 몰입하며 지식과 사상들을 흡수해 들이기 시작했다. 불교 철학은 물론 철학과로 가 서양철학도 수강했다.
당시 철학과 김용정교수님이 “철학은 경탄(驚歎)의 념(念)에서 출발한다.” 는 강의 첫마디는 준희의 심장 속에 꽂혀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경탄하지 않으면, 매사에 감탄 없이 살아간다면 인생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무할까?’라는 생각이 뇌리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녀 인생에서 처음으로 삶의 가치에 대한 철학적인 사고가 깊이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삶이란 늘 ‘경탄의 념’이 솟구치지 않는 다면 무의미하다는 것이 절절하게 그녀 마음속에 박히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준희 삶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강의 시간에 들었던 철학적인 내용들을 생각하느라 늘 사색에 몰두하며, 무엇보다 불교나 서양철학에서 쏟아져 나온 엄청난 지식들 하나하나가 모두 흥미로웠다. 이로 인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연이어 일어나며 준희는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사람이나 외모에 대한 관심과 흥미는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며 사색에 잠겨 들었다. 그러다가 그 사색의 끈이 놓아졌다고 생각되면 주저 없이 고속버스를 타고 강원도 월정사에 가서 며칠이고 절을 하며 다시 마음을 추슬러 잡았다. 이런 생활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오가며 반복하니 그 절에 있던 보살 아주머니 들은 어떻게 저렇게 젊은 서울 학생이 먼 강원도까지 찾아와 절을 하느냐고 감탄한다.
원준희의 삶은 그때부터 스스로에게 아주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살았다. 그 잣대라는 표준이 준희에게는 “경탄의 념” 이 내면에서 느슨하게 잊혀 가는, 마치 '고여있는 물'처럼 평범하고 나태한 일상으로 돌아가 사색의 끈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이 세운 원칙에 스스로 충심을 다해 지켜내는 모습이 마치 다른 사람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하던 소꿉놀이나 초미니 스커트로 멋 내기에 열중했던 자리를 대신했다. 준희의 이 몰입성은 그녀를 평생 지배하며 새로운 타깃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음 또 다음으로 이어져 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돌이켜보면, 원준희는 매사에 호기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듣고 생각하고 했던 인물인 거 같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대상 누구에게나 귀 기울이며 헛으로 버리지 않는 습관으로 이어진다. 준희의 이런 성향의 원천은 아마도 늘 묵묵히 뒤를 밀어주시던 부모님의 양육 방식에 있는 게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