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도화지 위를 검정 붓펜이 수면을 스치는 바람이 되어 어른거린다.
허연 공백위에서 잠시 주저하던 붓이 이내 서로 다른 질감과 두께를 지닌 직선을 도화지여백에 여기저기 긋기 시작했다. 어떤 건 길게, 아래는 두껍게, 옆은 좀 가늘고 꼬리는 흐릿하게... 여유롭게 움직이는 펜을 쫓다 보니 어슴푸레 풍경이 보인다. 비탈 위 작은 집? 좀 더 선이 그어지면 명확해지려나? 그래 아직 밑그림이니까?
탱탱하고 질척한 펜으로 곡선아닌 다소 반듯한 선을 긋던 손이 잠시 멈춘다. 응? 밑그림은 저게 전부? 뭔가 허술한데? 나중에 다른 색으로 입체감을 주려나? 그렇겠지. 도화지 옆에 아담한 접시가 덩그라니 놓여있다. 아마도 팔레트 대용인 모양인데 이제 사용한 셈인가? 하지만 상앗빛 아담한 접시 위엔 그저 맑고 깨끗할 뿐 아무런 물감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사라졌던 다소 야생적이고 투박한 길쭉한 손이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그 손엔 여느 붓이 들려있다. 학창 시절 흔하게 학교 앞 문방구에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그런.
그런데 그 붓이, 아니 그 손이 뭔가 파격적인 행동을 한다. 아담한 접시에 물을 약간 따르곤, 붓을 접시에 살짝 담갔다. 그리곤 도화지에 그려진 밑그림에 붓을 가볍게 털어냈다. 탁... 탁... 손목을 가볍게 아래로 튕기자 자연스레 붓에 스며들어있던 수분이 도화지에 점점이 흩뿌려졌다. 때론 스포이트로 물을 바닥에 떨구듯이 수분을 잔뜩 머금은 붓을 털지 않고, 그대로 붓에 매달린 물방울 아슬하게 대롱대롱 매달고는 도화지 위에 군데군데 무심히 떨궜다. 작은 물방울과 덩어리 채로 흩어진 도화지위를 잠시 비추던 화면에 다시 투박한 그 손이 나타났다.
물방울을 도화지위에 뿌려대던 붓을 그가 그엇던 선에 가져다 댔다. 수성펜으로 쓴 글씨에 물방울이 떨어지면 잉크가 풀어지듯, 도화지를 눅눅하게 만들고 있던 잔 물방울이 검은 선으로 스르르 침범했다. 마치 짙은 먹물과 깨끗한 물로 안개긴 산천을 그려내는 수묵화처럼 밋밋한 선이 점점 풍만해진다. 색이 좀 진하면 주변 물방울을 끌어와 톡톡 두드리며 머릿속 풍경을 옮겨놓는다.
무더운 여름날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가방이 젖을까 품에 껴안고 집으로 뛰었던 학창시절. 빗물에 흥건한 가방 대충 털어내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축축한 지퍼를 열어 가방안을 엿봤었다. 손으로 젖은 부분을 더듬거리다 손에 느껴지는 축축한 물기에 좌절해 젖은 책과 노트를 꺼내 물을 탈탈 털어 냈었던. 물기로 서로 엉켜붙어 떨어지지 않는 노트를 혹여 찢여질까 조심스레 넘겨 확인해보면, 역시나 형태를 알아볼수 없을만큼 뭉개진 글씨. 잉크 번짐을 경험했지만, 이 현상으로 그림을 그려볼 생각을 해본적은 없는데. 예술가의 감성과 상상력은 이렇게 독특해야 할까?
그렇게 도화지에 흩어져 있던 물방울로 의미없던 밋밋한 선은 낡은 기와, 창문, 지저분한 길이 되어 그풍경이 되어갔다. 투박한 손은 다시 한번 검정 붓펜으로 여러 직선을 그었고, 그리고 다시 물방울... 어느샌가 그림을 완성한 손은 투박함이 아닌 섬세함을 지닌 그럴듯한 손으로 변모해, 붓을 잡고 비탈에 자리잡은 낡은 집 한 귀퉁이에 이니셜을 조심스레 그려 넣었다. 글자가 아닌 그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