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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ty Jun 07. 2022

그리운 시절

난 어릴 적에 삐쩍 골았었다. 친구들은 수수깡이나 갈비씨라고 나를 놀렸었고, 계절이 바뀔 때면 콧물을 항상 달고 지냈었다. 어쩔땐 학교 수업시간에 워낙 심하게 기침을 해대서 선생님이 나를 복도로 내보냈던 적도 있었다. 가족은 부모님과 큰 누나와 형님 둘과 나 이렇게 살았었다.


집은 외진 동네의 비탈길 위에 아슬하게 걸쳐있었고, 방은 햇볕이 안드는 어둑하고 눅눅한 그런 곳이었다. 부모님은 매일 날품팔이 하시듯 새벽부터 일터를 찾아 나섰다. 그래서 아침밥은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큰누나가 챙겨줬었다. 가뜩이나 입이 짧았던 난 누나를 상당히 곤란하게 했을 것이다. 가끔 만나면 지금도 너 때문에 학교도 지각했었다고, 빼빼 말랐던 못난 나를 끄집어내곤 한다.


그 당시 큰형은 중학생이었는데, 사춘기를 지나는 시기였는지 나와 큰 접점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큰형과는 어릴적에 되새길 만한 추억은 없다. 그에 반해 둘째 형은 나와 3살 터울로, 심한 개구쟁이였다. 게다가 덩치도 나와는 달라 또래에 비해 컸고 쌈박질도 잘했다. 그래서 형이 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진 초등학교 생활이 편했었다.

이런 둘째 형을 따라 빛바랜 은색 양철대문을 눈물을 훌쩍이며 마지못해 등굣길에 올랐었다. 몸이 약한 나에게 학교를 가는 길은 좋은 놀이가 아니었다. 몸보다 훨씬 큰 커다랗고 무거운 가방을 힘겹게 메고, 내 짧은 보폭으로 족히 30분이 넘게 걸리는 힘든 등굣길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 가기 싫어서 방 안에서 내가 미적거리면, 둘째형은 처음엔 말로 재촉했었다. 하지만 말을 듣지 않고, 따라나서지 않으면 둘째형의 투박한 손맛을 보고, 질질 짜면서 억지로 대문을 나섰다. 그래서 엄마가 쉬는 날을 항상 기다렸었다. 엄마는 '막둥아'하고 내 손을 잡고, 때론 따뜻한 엄마 등에 업혀 도란도란 비밀얘기도 함께 했다.


하수도 물이 흥건한 지저분한 골목길, 곳곳에 구멍이 난 헝겊같은 시멘트길, 사람손길에 하얀 페인트가 버석하게 깨져 은빛 속살이 노출된 스테인리스난간....혼자서 고개를 숙이고 언제 이 지겨운 길이 끝날까 눈이 짓무르게 원망했지만, 포근한 온기와 말투 그리고 엄마냄새는 항상 무적이었다. 두눈 질끈 감게 하던 항상 어두웠던 좁은 골목길도, 두눈을 부릅뜬채 나를 노려보던 낡은 공포영화 포스터도 엄마가 옆에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엄마도 내 작은 손을 잡았을 때 그랬을까?


학교를 가다가 주변에 한 눈 팔다가 조금이라도 발걸음이 느려지면, 어느새 다가온 둘째 형은 호통으로 나를  움츠리게 하고 억센 손으로 나를 빼액 울렸었다. 그리곤 훌쩍이고 있는 눈물을 닦고 있는 내 손을 억세게 잡아끌고 가던 길을 서둘렀다. 어른이 된 지금, 정수리를 더듬거리면 낮은 언덕처럼  볼록하게 튀어나와있다. 아마도 어릴 때 쥐어박힌 영향이 아직 남은 듯한데.... 


한 손은 흘러내리는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한 손으론 자꾸 내려가는 바지춤을 잡고 형에게 맞지 않으려 바삐 걸었다. 거기다  고무줄이 한껏 늘어진 양말이 자꾸 내려가, 잠깐 멈춰서 양말을 끌어올리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형을 부르며 쫓아갔었다. 가정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새옷을 사는 일은 가뭄에 콩나듯 드문 행사였다.  


어릴적 영향인지 지금도 옷을 자주 사지도 않고, 많지도 않다. 그저 필요한 옷만 한구석에 쌓여있을 뿐. 그 당시 개구진 형의 허름하고 낡은,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해묵은 옷을 당연시하며 물려입었다. 엄마가 바쁘지 않으면 옷을 내 몸에 맞게 고쳐주셨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내 팔보다 한 뼘이나 큰 소매 덕에 몇 겹이나 접어야 했고, 바지는 허리가 커서 잠시만 방심해도 주르르 흘러내려가 내  낡은 팬티를  친구들에게 구경시켜줬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난, 내가 입은 다소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이 부끄럽지 않았었다. 다만 불편했을 뿐. 게다가 주변 친구들 옷차림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학급의 부유한 몇몇을 제외하곤, 대부분 형이나 언니의 옷을 나처럼 물려 입었다. 머시마들은  커다랗고 기다란 바지를 딸딸 걷어 올렸고, 기집애들 역시 언니에게 물려받은 펑퍼짐한 치마가 허리에서 빙글 헛돌지 않도록  허리춤에 다 삭은 옷핀을 몇 개나 꼽고 다녔다.


그래서 학교 끝나고 모여서 공을 차거나 숨바꼭질을 할 때 머시마들은 종종 맞지  않는 큰 바지를 벗어버리고 누런 팬티만 입고 뛰어다녔고, 기집애들은 치렁치렁한 치마를 가랑이 사이로 넣어  바지처럼 옷핀으로 고정한 후 검은 고무줄에 다리를 걸었다.


그때는 창피한지도 모른 채 그렇게 누런 먼지가 풀풀 날리는 거친 황톳빛  운동장을  뛰어다녔었다. 지금도 간혹 그때를 생각해 보면, 주변에 부잣집 아이가 있었는지를 거의 못 느끼고 지냈었다. 내가 어려서 그랬을  수도 아니면 그들이 어렸을 수도...

운동장에서 놀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작은 점방이 있었다. 오래된 기와집 한쪽을 길쪽으로 뚫어놓고, 그곳에 좌판을 늘어놓은 곳이었다. 좌판엔 여러 잡다한 장난감이나 학용품 그리고 한쪽에 작은 화덕을 놓고 기름진 핫도그를 팔았었다. 이름은 핫도그지만, 손가락 한마디정도 크기의 분홍 소시지를 나무젓가락 끝에 끼운 후 밀가루 반죽을 한 움큼 묻혀 튀겨낸 음식이었다.


막 튀겨내 바싹한 핫도그에, 그 당시 그곳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이국적 양념 케첩을 이리저리 길게 팔자로 발라 먹었다. 가격은 50원. 엄마가 핫도그 사 먹으라고 준 50원으로 친구들 틈에 껴 사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다 50원을 어둑한 지하에서 삐리링 들려오는 전자오락의 유혹을 견디지 못해, 갤러그에 빼앗겨 버린 날이면 친구 옆에서 한입만을 외쳤더랬다.


간혹 길을 지나가다 이때 기억이 떠올라 핫도그를 사먹어 봤지만, 어릴 적에 친구들과 먹던 케찹보다 휠씬 더 시큼달콤한 토마토 케찹도, 그리고 분홍 소시지보다 훨씬 커다란 후랑크도 낡은 기억 속 그 기름진 맛을 이기지 못했다. 난 아마도 핫도그보다 그 당시 친구들과 함께 했던 시절이 그리웠다.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면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싸돌아다니길 좋아하는 둘째 형은 저녁 밥 먹을 때가 되어서 지저분한 상태로 나타났었다. 그래서 같은 집에 세 들어 사는 꼬마애들과 투닥거리다가 해가 질 무렵이면 엄마를 마중 나갔었다. 우리 가족이 세 들어 살던 집은, 꼬불꼬불한 골목길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낡은 대문 중에  붉은 저녁 노을을 좁은 마당에 아른거리게 하는 반질한 은색 대문 집이다.


마당에 붉은 기운이 어른거리면 엄마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노을빛이 넘실대는 대문을 열고, 물이 흥건한 지저분한 골목을 지나 기다란 비탈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에 앉아 가끔 비탈아래 하천을 힐끗거리며  엄마가 빨리 오기를 기다렸다. 혹여 딴짓을 하다 엄마 오는 것을 놓칠까 흙놀이에 정신을 팔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아래를 살피곤 했다.


해가 슬슬 넘어가고 저 멀리 다니는 사람들이 흐릿해 질 무렵이면 '막둥아'하는 기다렸던 소리가 들려온다.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쫓아 고개를 내리면 저 멀리 환하게 웃으며 나를 부르는 엄마가 보인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다 낡은 펑퍼짐한 몸빼바지를 입고 한 손엔 검정 봉지를 들고 내게 손짓하는 엄마의 환한 모습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반갑게 부르며 뛰어내려 가고 싶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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