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낡은 체크무늬 셔츠가 있다. 붉은색 계열과 푸른색 계열 바탕에 흰 줄무늬가 감초처럼 뒤섞여 있는 오래된 셔츠다. 나는 날이 조금 서늘한 봄이나 가을같이 애매한 계절에 낡은 셔츠를 걸치고 지낸다. 몇 년 전 식탁의자에 시큰둥하니 걸려있던 셔츠를 대충 걸치고 다니곤 했었는데, 어느새 내 옷장 한켠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내가 입고 다니는 걸 보고 옷장에 넣어둔 것 같은데 아직도 옷의 원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고 있다.
여하튼 두꺼운 옷을 입기에는 거추장스럽고, 반팔 셔츠만 입기에는 애매한 날에는 이 녀석을 걸치고 다녔었다. 그래서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서 '너는 그 옷밖에 없니'라는 면박 아닌 면박을 듣곤 했었다. 하지만 편하고 좋아서 지금도 가까운 곳을 나갈 때 이 녀석을 걸치고 다닌다. 다만 전에는 외출복이었다면 요즘에는 실내복으로 애용하고 있다.
난 옷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가족이나 친구는 절대 아니라며 입을 모아 말을 반박을 했다. "아니야. 유독시리 까탈을 부려"라고 한다. 글쎄? 난 동의하지 않지만 나를 봐온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난 평소 옷을 잘 사지 않는다. 일 년에 한 벌, 많으면 두어 벌? 그리고 옷이 찢어지거나 상하기 전까지 계속 입는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종종 묻곤 했다. '지겹지 않니? 맨날 같은 옷이나 비슷한 옷만 입고.' 내 대답은 '글쎄?' 였다. 격식에 맞는 어긋나는 옷을 입지는 않지만, 격식을 맞추더라도 조금 더 익숙하고 편한 옷이 더 선호한다. 게다가 내 습성인지 한번 사면 그게 상하지 않으면 끝까지 사용한다. 옷뿐 아니라 다른 가구, 전자제품까지. 요즘은 재질이 튼튼한지 잘 상하지 않아서 더욱 좋다. 오래된 옷은 10년도 더 지난 것도 있다. 하지만 오래 입는다고 해서 옷을 아껴가며 입지도 않는다. 오히려 막 입는다고 해야 하나?
대신 옷을 살 때 브랜드 옷을 산다. 너무 고가의 옷을 구매하지는 않지만 셔츠나 바지, 점퍼는 가급적이면 튼튼하고 좋은 재질의 브랜드 옷을 구매한다. 그래서 옷이 잘 헤지지 않았던 걸까? 아무튼 이런 이유로 일 년 동안 사는 옷이라고 해봐야 티셔츠나 내의, 속옷 정도다. 간혹 청바지를 사곤 하는데 내 눈이 내외를 하는지, 새 옷이 어색해 보여서 한동안은 옷장에 넣어둔다. 그러다가 얼마 후 하루아침에 생긴 변덕으로 새 옷을 입곤 한다.
내 옷 취향은 심플이다. 우선 색감은 어두운 계열의 옷을 선호한다. 형형색색의 옷은 극혐하기에 내 옷들은 대부분 검은색, 남색, 짙은 파랑(?) 같은 단색 계열이 주류를 이룬다. 내가 좋아하는 색들을 나열해 보니 낡은 체크 셔츠를 자주 입는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그리고 이런저런 글이나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은 옷, 혹여 마크가 돌출되어 있는 옷을 기피한다. 피부가 민감해서인지 돌출된 부위가 닿으면 상당히 간질거려서 손을 자주 올린다. 흠... 이렇게 보니 약간 까탈스러울 수도.
지금도 낡은 체크 셔츠를 입고 있다. 반팔만 입고 있기엔 왠지 허전하고 서늘한 감이 있어서, 대충 소매를 걷어붙인 채 걸치고 있다. 이 녀석도 옷감이 좋은 재질인지 여간해서는 잘 구김이 보이지 않는다. 잠시 외출하기 전 옷을 서너 번 탁탁 털어서 입으면 별로 추레해 보이지 않아 마음에 든다. 오래된 옷 특유의 자연스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짙은 체크무늬라서 그런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내 눈에만 멀쩡한 건가?
단풍을 볼새도 없이 달리는 가을 탓에 체크 셔츠는 곧 다른 묵직한 녀석에게 자리를 내줄 예정이다. 이제는 좀 더 두툼한 후드집업을 걸쳐야 하기에. 낡은 체크 셔츠는 옷장 속에서 쿱쿱한 나프탈렌 냄새를 맡으면 긴 겨울을 보내야 한다. 옷장 문이 열릴 봄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