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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ty Oct 28. 2022

허름한 오후

몇 년 전 무던히도 덥던 8월 어느 날. 

퀴퀴하게 풍기는 방부제 냄새와 텁텁한 사내들 냄새에 시린 눈을 가늘게 뜨고, 짜증과 더위를 참으며 치밀어 오르는 게으른 한숨으로 유난히 길었던 예비군 훈련을 끝냈다. 집에 또 언제 가냐? 버스도 없는 도시 외곽. 상의를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채 터벅거리며 군부대 비탈길을 내려왔다. 역시 휑하다. 잠시 화장실을 들렀더니 모두 쌩하니 가버린 모양이다. 다른 곳이라면 사람들이 뭉그적거렸을텐데, 예비군 훈련은 끝나기가 무섭게 빠르게 자취를 감춘다. 군부대 특성상 버스가 다니는 곳까지 걸어가려면 30분은 더 걸어야 할 텐데, 8월 땡볕 아래를 오랫동안 걸어갈 생각에 앞이 막막하다. 게다가 군복은 왜 이리 거슬리고 뻣뻣한지. 


혹여 부대에서 나오는 차가 있으려나 얼쩡거렸지만 그저 매미울음소리만 시끄럽게 울어댔다. 게다가 부대 앞에 서 경계근무를 서는 군인들의 시선에 괜히 뻘쭘해져서 어쩔 수 없이 자글자글 끓고 있는 도로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거추장스러운 군복 상의를 아예 벗어서 대충 어깨에 걸친 채 아스팔트 옆 황톳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스팔트를 바른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새까만 도로에서 풍기는 악취에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저기 보이는 일렁이는 도로를 아직 한참 걸어가야 했기에 자꾸 늘어지는 발걸음을 재촉하려 애를 썼다. 땀에 절은 반팔 면티를 어깨에 딸딸 걷어올린 채 매미들의 애끓는 구애소리를 들으며 나름으로 열심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몇 분 걸었을까? 뒤에서 '어디까지 가세요?'라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응? 괴롭히던 더위를 순간 잊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쨍한 햇볕을 기름지게 반사하는 듬직한 검은 suv가 서 있었다. 참나. 나는 그렇게 괴롭히더니 저 차는 저렇게 번쩍이게.... 


'타세요.'


 '예. 고맙습니다.'


뒷자리는 좀 아닌 것 같아서 앞자리에 탔다. 하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과 얼마나 살가운 대화를 하겠는가? 그저 뻘쭘하게 앞만 볼뿐. 그리고 그가 내민 친절에 서먹함을 무릅쓰고 온몸으로 고마움을 표현할 뿐. 열심히 한나절을 반추하며 쌩한 어색한 공간을 채우려 노력했다. 


도로에 차가 많아지고, 버스가 한두 대 보일 때쯤 저만치에 정류소가 보인다. 나 혼자 걸어왔다면 부지런히 걸었어도, 최대 30여분은 걸렸을 거리를 채 10분도 안 돼 금방 도착했다. 관대한 친절에 보답하려고 억지로 쥐어짜 내던 대화거리가 막 떨어진 참이었다. 그리고 마침 정류소 옆에 슈퍼가 있어 음료수로 고마움을 표하려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었다. 하지만 뒤에서 눈치 없는 버스가 유달리 재촉해서 어쩔수 없이 어색한 몸짓과 표정으로 고개만 숙였다. 


다소 홀가분한 감정을 느끼며 다가온 버스 행선지를 살폈다. 응? 오늘은 운이 좋네. 문을 닫기도 전에 출발하려고 움찔대는 버스에 재빨리 올라탔다. 집 가는 버스가 아니라면 시원한 콜라 한 캔 마시려 했는데, 하지만 땡볕 아래에서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서 있는 버스에 올라 땀으로 축축해진 지갑을 뒷주머니에서 꺼내, 나를 관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기사 아저씨한테 '덥네요'와 눅눅한 지폐를 건넸다. 아저씨는 심드렁하게 버스 문 레버를 당겼다. 버스는 내가 앉을 자리를 탐색하기도 전에 '삐익'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큰 덩치를 덩실거리며 출발했다. 나는 익숙한 갑작스런 움직임에 여상스레 균형을 잡으며 어중간 오후의 텅 빈 버스의 명당자리를 향해 주춤거리며 다가갔다. 


순간 덜컹?! 방지턱을 호기롭게 통과하는 버스 움직임에 잠시 안전 기둥을 잡고, 버스 뒷자리 창가에 자릴 잡았다. 좌석은 밉살스러운 쨍한 햇볕에 달궈져 뜨끈했지만, 이제 집에 간다는 안도감에 아무렇지 않았다. 아침에는 부대 가는 게 그렇게 싫더니 집 가는 길은 너무나 즐겁다. 그리고 당연히 해야 할 의례적인 행사처럼 뻑뻑한 창을 오른손에 힘을 줘서 끝까지 밀어냈다. 얼굴에 강하게 들이치는 햇볕과 바람에 눈을 뜨긴 버거웠지만, 마음은 홀가분하다. 그래. 집에 가자.  


커다란 산을 가파르게 깎아 올린 오르막을 느긋이 오르던 마을버스가 꼭대기 정류장에 잠시 정차했다. 아낌없이 쏟아지는 햇볕 때문인지 길가의 가로수가 길게 줄기를 뻗어 풍성한 나뭇잎으로 나를 건들인다. 바람도 높은 산을 한 번에 넘기 힘들었는지 풍성한 잎에 한숨을 돌리고 있던 실바람이, 넓적한 나뭇잎을 자꾸 내 얼굴에 치댄다. 얼굴을 간질이는 푸른 잎을 하나 뽑으려다, 나뭇잎의 매끄럽고 촉촉한 생생함에 손끝으로 잎을 살살 문지르며 청량함만 잠시 빌렸다. 그사이 숨을 충분히 돌렸는지 덜거덕 소리와 함께 삐-안내양이 나를 지적한다. 경고음에 손을 재빨리 뗐지만 괜히 머쓱하다.


완만히 길게 이어진 내리막을 버스가 창틀을 드르륵  격하게 진동시키며 산 아래로 질주하고 있다. 얼마나 왔는지, 눈을 돌려 정면을 보니 빠르게 질주하는 버스에 기사와 드문한 승객만 단촐하다. 덜컹거리는 창으로 빨려 들어온 바람이 재빨리 열기를 몰아 창으로 쏜살같이 도망친다. 덜컹덜컹. 주위는 큼지막한 쇳덩이가 허공을 부딪치는 마찰 소리에 시끄럽지만 묘하게 적막감이 들고 쓸쓸함이 밀려든다. 익숙한 공간을 밝히는 햇빛, 덜컹거리는 버스 그리고 버스를 스치는 바람 소리. 괜히 잦아드는 감정을 아릿한 한숨으로 뱉어냈다. 


어느새 다시 도심으로 들어온 버스. 주변은 다시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와 거리의 사람들이 내는 소리에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순간 끼익 멈춘 버스. 하지만 엔진은 여전히 성을 내며 털털거리고 있다. 생선 가시에 걸린 길고양이처럼 켈룩이며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다. 꼭대기 마루의 나뭇잎에서 만났던 실바람은 여전히 나무잎 사이에서 게으름을 피우는지, 열린 창틀에 걸친 손에 바람 한 점 걸리지 않는다. 따가운 햇볕에 손이 따가울 지경이다. 창으로 넘어오는 악취와 열기에 숨이 턱턱 막힌다. 자동차에 뿜어대는 매케한 배기가스를 배경삼아 하늘하늘하게 아롱이는 아지랑이만 신났다.


몽환적으로 아롱이는 녀석에게 홀릴까 봐 고개를 돌리다가 저만치에 있는 하얀 횡단보도 너머 정류소가 눈에 띈다. 사람들은 뜨겁게 내리쬐는 오후 땡볕을 피해 정류소 안이나 그늘진 공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는 사이 버스가 신호를 받았는지 매캐한 헛기침으로 움직였다.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람들의 고정된 시선이 느껴진다. 자신이 기다리던 버스가 아닌지 빼꼼했던 시선을 다시 거둬들이는 사람, 기다리던 버스였는지 주머니나 가방을 뒤적이는 사람 그리고 그냥 궁금한 사람.....  신호등에 걸려있는 사이 텅 빈 버스를 케케하게 오염시킨 기름 냄새가 점차 흐릿해지고 괜스레 웃음이 났다. 나도 저랬으려나?


횡단보도를 지난 버스가 다시 끼익 정차했다. 그리고 덜컹. 삐익. 삐익.... 옆자리에 친구가 생겼다.  


사거리 횡단보도를 지나면 내려야 한다. 빠트린 게 없는지 엉덩이를 더듬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익숙한 감촉을 확인하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완만하고 긴 곡선을 따라 기우뚱 도는 버스 때문에 한쪽으로 쏠리는 몸을 노란 기둥에 기댄 채 창밖을 응시했다. 그리고 완만한 커브가 끝나고, 왼쪽 어깨에 걸친 군복 상의가 흘러내리지 않게 조심스레 벨을 눌렀다. 삐익. 나와 같은 곳에 내릴 심산이었는지 앉은 채로 벨을 찾아 두리번대던 사람이 스마트폰을 든 채 일어선다. 


덜커덩. 버스는 검은 매연을 뿜으며 떠나고, 나는 다시 땡볕 아래 덩그러니 서 있다. 밤새 나를 못살게 굴던 모기처럼 뜨거운 열기가 내게 덤벼든다. 이글이글 달아오른 보도블록에 족쇄처럼 묵직한 군화 뒷굽을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갈아냈다. 자꾸 흘러내리는 상의를 신경질적으로 추켜올리고, 몇 걸음 떼기도 전에 깜박이는 신호등을 바라보며 걸음 재촉했다. 하아... 질척한 땀이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녹아 엿처럼 끈끈하다.


건물에 비스듬히 드문드문 거리를 칠하는 검은 그림자를 징검다리 건너듯 햇볕과 술래잡기를 하며 비스듬한 비탈로 향했다. 조금만 더 걸으면. 저 비탈만 올라가면. 뻣뻣한 군복상의 때문인지 왼쪽 어깨가 너무도 끈적해서 다시 손으로 뭉쳐 들고, 어깨에 남아있던 끈적한 땀을 쓸어내리며 비탈을 올랐다. 마치 거친 비탈언덕을 힘겹게 오르는 고승처럼. 내 걸음만큼 흐느적거리는 그림자를 밟으며 걷다가 어느새 비탈길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흐음... 자주 가는 슈퍼 유리문에 비치는 내 모습이 안쓰럽고 허술해 보인다. 공사장에서 벽돌 지게를 종일 맨 사람처럼 후줄근하다. 가게 앞에 놓인 길쭉한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시선이 뺏겼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딸랑.  


'엄마! 나왔어.'

문을 열고 들어간 식당은 평소완 다르게 휑했다. 4시가 약간 넘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항상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식당 주인이 보이질 않았다. 자리를 비우고 어딜 갔지? 식당 주방과 화장실 주변을 살펴봐도 인기척이 없다. 잠시 두리번거리다 내용물이 보이는 훤히 보이는 냉장고 유리문을 열고 물을 꺼냈다. 하아.... 냉장고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에 자연스레 한숨이 나온다. 시원함을 더 느끼려 냉장고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머리에서 발끝으로 쏟아지는 시원한 기분 좋은 서늘함에 소름이 돋는다. 좀 더 이렇게 있고 싶지만 평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따가운 잔소리가 생각나서 서둘러 냉장고 유리문을 닫았다.


작달막한 우윳빛의 두툼한 플라스틱 컵을 가져와 물을 따르고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냉수를 들이켰다. 침마저 바싹 말랐던 입안에 냉수가 들어가자 채 가라앉지 않고 있던 소름이 보다 선명히 솟아올랐다. 평소 이가 좋지 않아 찬물은 마시지 않았지만, 이날만은 몇잔을 들이켰다. 잇몸의 찡한 통증이 그만 마시라며 경고했지만, 한 잔으로는 부족했기에. 다시 다시 물을 찰랑이게 따라 마시려고 할 때  딸랑 소리가 들렸다.


'언제 왔어?' 


반갑지만 갑작스러운 방문에 엄마는 다소 생뚱맞은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마시던 물을 다 삼키고 찡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어디 갔다 왔는데?' 하지만 내 물음은 평소처럼 가볍게 무시하곤 항상 앉던 티브이 앞에 자리를 잡았다. 디잉... 리모컨을 꾹꾹 누르며 원하는 채널을 찾고 있는 엄마에게 다시 물었다.


'어디 갔다...'


'썩을 놈이 말하면 알어? 옆에 갔다  왔다.'


엄마는 귀찮은지  심드렁히 말하곤, 내꼬라지를 찬찬히 살폈다.


'얼굴이 벌겋게 익었네. 산도 뛰었어?'


'그럼.  꼭대기까지 뒤지라고 뛰어다녔어.'


물컵을 대충 밀어두고, 엄마 뒤로 가서 너스레를 떨었다. 실상은 병든 닭처럼 졸기만 했지만...


'밥은?'


'배고파 뒤지것어.'


상의를 들어 올려 끈적한 배를 더듬으며 죽는소리했다. 어이구... 엄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들고 있던 리모컨을 바닥에 두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뭐해줄 건데?'


'아무거나 먹어.' 


'그거 있잖아. 돼지고기 넣고, 새우젓으로만 간해서 만든 거.'


'앰병...'


내 말에 뭐라고 입을 달싹이던 엄마는 주방 기둥옆에 있던 냉장고에서 하얀 비닐봉지를 꺼냈다. 그리곤 비닐도 다 벗기지 않고, 일부만 벗겨 벌건 돼지고기를 도마에 올려 한 덩이를 시큰둥이 숭덩 썰었다. 다시 비닐 덩어리를 대충 갈무리하곤 냉동실의 문을 소리나게 탁 닫았다. 그리고 도마 옆에 있던 청양고추, 파, 양파를 주섬주섬 챙겨 도마에 올려놓고, 대충 얼기설기 썰고는 도마를 아무렇게나 한쪽에 밀어뒀다. 그리고는 싱크대 아래로 허리를 숙여 무언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자그마한 검은 뚝배기를 탕하고 놓았다.


'고기 많이.'


옆에서 간섭하는 내 말은 듣는 시늉도 않하고 검은 뚝배기에 물을 받아 검은 화덕을 닮은 가스레인지에 다시  탁.


'물이 너무 적은거 아니야?'


역시나 간단히 내 말을 무시하곤 가스점화기인 뚝딱이를 들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였다.


'오늘 뒤지게 덥더라.... 갈 때는 택시 타고 가서 몰랐는데 한참을 걸어... 뭐라고? 밥? 먹었지. 도시락 먹었어. 근데 도시락이  너무 시원찮....올때 어떻게 왔냐고? 차 얻어타고 왔지. 내가 누군데. 대충 지나가는 차 붙잡고....'


초등학생이 집에 와서 그날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쫑알거리며 이야기하듯이, 한나절 있었던 일을 솜사탕처럼 부풀려 수다를 떨었다.


'그래... 바보 같은 놈.... 빨리 가라고 했지.... 휴지는... '


아마도 옆집 이모하고 한참 수다를 즐기다 왔을 텐데, 내 허풍에도 귀찮아하지 않고 이런저런 추임새를 넣으며 상대를 해주셨다. 


엄마 요리를 보면 뭔가 대충 하는 것 같은데 맛있다. 물도 대충, 소금도 대충, 간장도... 뭔가 설렁설렁 정해진 레시피따윈 없이 그날 있는 재료로만 하는데 맛있다. 엄마 음식에 길들여져 그런가? 대충 흰소리를 하고 있자니 까만 뚝배기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더위에 질려 잊고 있었던 허기가 혓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흠.. 흠.. 괜히 즐거워진다. 


'다 됐어. 먹어'


'맥주도 한잔할까?'


'썩을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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