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르다 May 28. 2021

내가 좋아하는 여자들

이사비용

P는 내가 간다는 말에 전 날부터 장을 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하니 주방에서 부산스럽게 음식을 해댔다.

여러 음식 중에 감자를 채 썰어 야채와 함께 얇게

부쳐낸 감자전이 제일 맛있었다.

그 맛이 생각나 집에서 몇 번인가 해 먹어 봤지만

역시 그 맛이 아니었다.

P는 물건 사는 데는 인색해도 식재료 사는 데는

아끼는 법이 없어 '우리 집은 엥겔지수가 높아!' 라며 깔깔 웃고,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것은 돈이 아깝다며 호들갑을 떠는 못 말리는 짠순이다.

같이 있으면 별일 아닌데도 웃고 별일인데도

웃어 버리다 보면 집에 올 때쯤 늘 목이 아팠다.

나는 그 감자전을 좋아하고 그 검소함과 씩씩함을 좋아한다.

-

엄마 J는 우리 집에 와서 아메리카노를 달라기에

따뜻한 것으로 줬더니 아이스는 없냐며 속에서

열이나 늘 덥다고 했다.

'아이 키우면서 무슨 따듯한 아메리카노냐' 라며

손부채질을 해댔는데 그 모습이 웃겨서 우리는

주방에 앉아 깔깔 웃어댔다.

그녀는 손이 야무져서 딸아이 머리를 암팡지게 묶고 손바느질로 원피스를 해 입혔다. 기다란 갈색 캉캉 원피스를.

출산하며 살이 많이 쪘다고 했지만 씩씩하게

아이들을 업고 여기저기 잘 다녔으니 아이들이

행복했을 것이다.

여름이면 오디밭에 가고 물가에서 물놀이도 하고

가을에는 캠핑을 다니며 밖에서 자고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 먹였다.

지금도 '아이스'를 마실 때마다 엄마 J가 생각난다.

-

A는 옷매무새가 단정하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게 무엇인지 잘 알아서 늘

넘치거나 부족하지 않게 꾸민다.

비싼 옷도 잘 입지만 저렴한 옷도 깔끔하게 입을 줄 알며 옷을 '잘' 사지만 그것들을 자랑하듯 뽐낸 적이 없다. 그녀의 조용한 성격과 닮은 모양으로 그 옷들도 그 몸에 차분하게 걸려있다.

잘 정돈된 방을 보는 것처럼 A의 모습을 보는 것은 작은 즐거움이었다.

또 그녀는 말주변이 좋다. 그녀가 본 세상얘기를

들을 때면 때로는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위로받기도 하며 대화의 기쁨을 느꼈다.

-

늘 웃는 L이 있다.

그런 그녀가 오랜만에 만났을 때는 밥을 먹다 말고 엉엉 울었다.

L은 잘 웃는 사람이지만 얼마 전 태어난 막내 얘기를 하다 울었다.

아기는 날 때부터 아팠다.

우리는 그날 밥상머리에서 울고 또 만날 때마다

계속 울었지만 헤어질 때는 L답게 웃고 나도 그녀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L이 전화로 웃으면서 '너무 힘들다.'라고 했을 때

나는 주저앉아서 울고 싶었지만 잘 웃는 그녀가

웃으며 얘기했기 때문에 나는 별 말없이 한숨으로 위로할 뿐이었다.

그녀는 잘 웃는다. 나는 그 웃음을 좋아한다.

그 웃음 아래로 드리워진 그늘을 요령껏 잘

숨기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사랑하므로 늘 걷다가  그녀를 위해 기도한다.

-

나는 얼마 전 다른 도시로 이사를 했다.

가져온 살림살이며 주변을 정리하다가 문득 내가

두고 온 여자들이 생각났다.

'아차.'

창밖을 보니 오고 가는 차 없이 텅 빈 도로와 겹겹이 산이 보였다.

나는 두고 올 수밖에 없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걸

그제서야 알고 거실에서 혼자 울었다.

이곳이 나에게서 가져간 이사비용은 너무 비쌌다.








이전 17화 기억되는 이름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