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일에도 수치스러워요 - 수치심과 이상화

내현적 나르시시스트의 감정 (2)

by 정신안아픔이

나는 몇 년간 학생들과 과외를 진행했었다. 그런데 매번 수업이 끝날 때마다 강한 수치심을 느꼈다. 아이들에게 더 좋은 스킬을 전달하지 못한 것, 아이들을 수업에 온전히 집중시키지 못한 것, 아이들 머리에 하나라도 더 넣어주지 못한 것 등, 매 수업의 흠을 잡으라면 늘 하나씩은 흠이 있었고 그 흠을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 했다. 그리고 나 자신이 흠결투성이 인간인 것을 학부모에게 조만간 들켜서 과외 자리에서 잘릴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곤 했다.


몇 년이나 과외를 맡아 진행할 정도면 학부모도 자기가 내는 비용 대비 교육에 대해 만족했다는 의미이다. 학부모들이 기부천사가 아닌 이상 말이다. 게다가 세상에는 완벽하고 모두가 만족하는 교육과 선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부모가 원하는 것, 학생이 원하는 것이 모두 다르고 모두의 입맛에 맞추기란 불가능하다. 또 수업을 듣는 시간 내내 집중하는 것은 어른인 나도 힘든 일인데 아이들이 수업 내내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이렇듯 내가 진행하는 과외를 정당화해 줄 말들이 차고 넘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과외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매번 자괴감과의 투쟁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괴로웠을까? 그건 자기 자신을 이상화해서 흠 하나 없는 완벽한 과외선생의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과했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하는 완벽한 역할이 있는데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결과로 이상과 현실 사이 간극에서 계속 실패감과 부적절함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과외 선생으로서 능력이 없다고 여기면 과외를 그만두면 될 일이다. 과외 외에 다른 일에서 능력을 발휘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과외를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하는 것이 과외라는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 전체의 거대한 결함이라고 여겼다. 과외라는 특정 직업 분야에서의 성취와 나 자신의 정체성을 구분해 낼 수 없었다. 과외에서의 나의 흠결이 나 자신 전체의 흠결이라고 여겼고 이는 치명적인 것으로 여겨져서 과외를 한 날이면 수업을 잘했건 못했건 수치심으로 괴로워했다.


어떤 분야의 흠결이건 이것은 특정 분야에서의 문제로 결코 축소되지 않고 전체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로 확대되어 인식되기 때문에 이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이러한 감정은 과대한 자기 자신의 상에 결코 부합할 수 없는 현실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한다. 모든 분야에서 완벽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나의 이상에 부합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한 폄하가 뒤따르고, 자존감은 계속해서 낮아진다. 내가 무언가를 이상적으로 수행해내지 못한다는 것으로부터 불안감이 커지고, 자기 자신이 현재 발 딛고 있는 곳에서 적절하게 기능할 수 없다는 자기 인식으로부터 부적절하다는 느낌이 뒤따른다.


이러한 수치심이 자기 자신을 향할 때 완벽주의, 통제에 대한 강박 등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러한 수치심이 외부에 향할 경우, 완벽하지 못한 타인에 대한 경멸과 교만함, 책망 등으로 드러날 수 있다. 나 자신도, 타인도 결코 완벽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이상이 너무나 높기에 이상에 부합하지 못한 나 자신과 타인 모두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혹은 자기 자신의 결함을 들킬까 봐 타인의 비위를 지나치게 맞추는 행동 양식이 나타날 수도 있다. 타인에 대한 책망과 비위 맞추기 모두 그 근원은 완벽한 자아상에 새겨진 균열이며,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 수치심이 뒤따른다.


참고

홍이화. 하인즈코헛의 자기심리학 이야기 1.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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