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11

by 송생님

오토바이 생활권인 나라에서 한 해에 절반이나 비가 오는 계절을 가진 것은 결코 잘 맞는 짝은 아닌 듯하다. 우기를 맞아 갑작스레 내리는 폭우에 흠뻑 젖은 퇴근을 처음 겪은 날에는 너무 당혹스러웠다. 당혹스러운 나와는 달리 운전기사는 건물 밑에 차를 잠시 세우고는 우비를 입으라고 했다. 거센 비는 금방 그칠 거라나. 도로 측면 여기저기에 아무렇지 않게 주섬주섬 우비를 입는 사람들을 보니 당혹스러운 사람은 나뿐인 듯했다. 내 몸만큼 소중한 노트북을 지키기 위해 운전기사가 건넨 우비를 걸쳤다가 이런 냄새라면 차라리 비를 맞는 것이 맞다. 는 결론을 내린 뒤에는 가급적 비가 올 거 같은 날에는 차를 타고 집에 가곤 한다.

웃긴 것은 비 오는 날 스포츠를 하게 될 때면 어이없는 웃음이 자꾸 나온다는 것이다. 천장이 뚫린 아파트 수영장에서 천둥번개가 치던 날 수영을 했던 것은 조금만 과학에 대한 상식이 있었더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만한 행동이었다. 그땐 잘 몰라서-어렴풋이 알았지만 무시했던 거 같기도- 그저 재밌었다. 테니스를 칠 때에도 종종 비가 오곤 하는데, 어떤 날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출발함과 동시에 비가 와서 그대로 그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오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시작하자마자 비가 와서 테니스장 처마 밑에서 무슨 7시마다 비가 오냐며 투덜댄 날도 있었다. 또 어떤 날에는 비가 온 김에 테니스를 같이 배우는 친구와 계획에 없던 밥을 먹으며 테니스 실력보다는 우정을 돈독히 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저녁 러닝을 하다가 비가 온 날에도 뛰면서 자꾸 웃음이 났다. 무슨 길강아지도 아니고, 비 오는 날에 길거리를 뛰고 있다니. 애들이 이래서 비만 오면 운동장 나가도 되냐고 물어보는 거였구나. 진짜 강아지는 아니라서 핸드폰이 젖는 게 좀 고민스럽긴 했지만 이 재밌는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비 오는 날에는 그간 계획해 놓은 일이 무엇이든 영락없이 집에 갇히게 된다.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몰아치는 창 밖을 볼 때 새삼스레 느껴지는 집의 포근함이 좋다. 장작불 같은 빗소리를 곁들이면 어떤 음악이든 더욱 근사해진다. 그런 날엔 책을 읽어도 잘 읽히고, 글을 써도 잘 써진다.(지금은 애석하게도 날이 맑다) 그래서 나가는 걸 좋아하는 편임에도 잠자코 집에나 있으라며 나를 얌전하게 만들어주는 날씨의 강제성이 좋다.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평소에 잘 안 하던 잔잔한 일상을 즐기게 만들어주니까.

일기예보를 안 본 지 꽤 오래됐을 만큼 비는 여기서 예상하지 못한 하루하루의 변수고,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작은 불행이자, 잘 계획해 놓은 하루를 덮치는 파도 같은 존재다. 비가 안 왔으면 테니스 실력이 좀 더 늘었을지도 모르지만 비가 온 덕분에 평범한 하루에 한 번 더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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