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아> 해석과 우울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이 웃는다. 자신의 우울감을 애써 웃음 뒤에 숨기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우울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웃음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뒤에 숨은 거대한 그림자가 보인다. 이 그림자가 자신을 삼키지 않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슬픈 눈빛도 보인다. 우울이라는 감정은 이토록 모순적이며 압도적인 감정이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멜랑콜리아>는 총 두 개의 극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극은 'Justine'으로, 주인공 저스틴(커스틴 던스트)과 마이클의 결혼식 모습을 담는다. 저스틴은 가장 행복해야 할 결혼식에 우울감을 느끼고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2시간 이상 하객을 기다리게 하고, 갑자기 목욕을 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행동들을 말이다. 그러던 중 하객으로 방문한 직장 상사의 부하 직원과 성관계를 맺게 되고 이를 본 남편 마이클은 그녀를 떠난다. 두 번째 극은 'Claire'로 언니 클레어(샤를로뜨 갱스부르)와 지구 멸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울증이 심각해진 저스틴은 클레어의 집에서 지낸다. 저스틴을 간병하기도 벅차지만 클레어를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지구를 근접 통과할 멜랑콜리아라는 소행성이다. 만약 과학자들의 예상이 잘못되어 근접 통과가 아닌 충돌이라면, 지구는 멸망한다. 클레어는 왠지 충돌할 것만 같다. 천문학자인 남편 존은 그럴 리 없다며 그녀를 안심시키고 아들 레오와 우주 쇼를 관람하기 위해서 준비한다.
'멜랑콜리아'는 프랑스어로 우울감을 뜻한다. 처음에 이 소행성은 태양의 뒤에 숨었지만, 점점 다가오면서 크기가 커지고 푸른빛을 반사한다. 밝은 태양빛에 가려서 모습이 보이지 않는 멜랑콜리아는 밝은 웃음 뒤에 숨은 어두운 우울의 특성을 보여준다. 또한, 멜랑콜리아가 다가오면서 수성, 금성과 충돌하지 않았다는 설정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저스틴의 내면에 대한 상징이다. 멜랑콜리아가 수성 혹은 금성과 충돌했다면 아니, 스치기라도 했다면 지구가 멸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극심한 우울감을 가지고 있는 저스틴이 막상 지구 멸망에는 담담한 것은 왜일까? 저스틴은 결혼식에서 클레어, 존, 마이클, 아버지,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아무도 그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가족마저 저스틴을 져버렸다. 이때, 그녀의 내면은 말 그대로 멸망했다. 내면이 멸망한 자에게 지구 멸망이 얼마나 큰 대수이겠는가. 영화 중반 저스틴은 지구가 사악하다고 말한다. 이는 지구 자체를 의미한 것이 아닌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사람들, 지구 공동체에 대한 혐오감과 실망감을 표현한 부분이다. 그녀가 우울할 때 그 누구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주지도 않았고, 하나같이 비난하거나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레오가 저스틴을 부르는 별명인 'Aunt Steelbreaker'는 강철 이모로 번역되었지만, 정확히는 '강철을 부수는 이모'라는 뜻이다. 저스틴은 이 별명에 걸맞게 신의 형상이다. 678개라는 콩의 개수를 정확히 맞추었을 뿐만 아니라 레오가 멜랑콜리아의 근접 통과를 보지 못할 것까지도 예측했다. 모든 일을 꿰뚫고 있는 그녀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저스틴과 클레어의 대화는 창세기 6장 13절과 닮았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Genesis 6:13-
Justine : Earth is evil. We don't need to grieve for it. (중략) Nobody will miss it.
Justine : All I know is, life on Earth is evil.
Claire : Then maybe life somewhere else.
Justine : But, there isn't.
-멜랑콜리아 中-
저스틴은 지구 이외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이는 외로운 그녀의 내면에 대한 비유이다. 아주 드넓은 우주에 지구에만 생명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녀도 넓은 세상에서 혼자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골프장의 홀 개수는 18개이고, 존은 결혼식장의 골프장 홀 개수가 18개라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무리 장면에서 19번 홀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볼 수 있다. 19번째 홀은 무엇을 의미할까? 18번째 홀까지는 확실히 존재하지만 19번째 홀의 존재 여부는 몰랐다. 19번째 홀은 존재와 공허의 경계라고 할 수 있다. 확장해보면, 19번째 홀은 림보(limbo)에 대한 상징이다. 림보는 지옥의 가장자리 혹은 고성소를 의미하는 가톨릭 용어이다. 즉, 19번째 홀은 無와 有, 천국과 지옥, 生과 死의 경계로 저스틴과 클레어, 레오가 최후를 맞이하는 장소이다.
내면이 멸망한 자에게 지구 멸망이 얼마나 큰 대수겠는가. 영화는 우울한 자의 내면을 분석하고 있다. 지구가 우울감이라는 소행성과 충돌하는 것은 저스틴의 내면 멸망에 대한 비유이다. 가족들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을 때, 그녀는 지구와 소행성이 충돌하는 수준의 충격을 받았고 철저히 혼자라고 느꼈다. 여타 다른 재난 물과는 다른, 철저히 개인적인 재난 영화 <멜랑콜리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