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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적 해석가 Apr 02. 2023

라이트하우스

원죄를 가진 자들의 구원을 향한 처절한 투쟁

“How would it be possible if salvation were ready to our hand, and could without great labor be found, that it should be by almost all men neglected”
“구원이 이미 우리 손안에 있고 힘들이지 않고 취할 수 있다면 거의 모든 인간이 구원을 등한시하지 않겠는가”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입니다. 죄를 저질렀을 때 용서나 구원을 얻기란 쉽지 않습니다. 타인에게 용서를 구했더라도 자기 자신을 향한 구원은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아예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해석할 영화 <더 라이트하우스>는 스피노자의 말을 대변합니다.


 뭍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두 등대지기가 접근합니다. 기존의 등대지기와 교대를 위해서입니다. 에프레임 윈슬로는 토마스 웨이크와 함께 4주 동안 살아야 합니다. 나이가 많은 토마스는 선장 시절 이야기로 대화의 물꼬를 틉니다. 에프레임 윈슬로는 과묵하여 이야기를 하지 않죠. 토마스는 폭력적이고 압제적인 명령으로 윈슬로를 통제합니다. 윈슬로가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등대에 기름칠을 하고, 태엽을 감고, 석탄을 떼야하죠.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쳤지만 토마스는 일을 하지 않고 더 못살게 굽니다. 게다가 업무 중에 술을 마시고 등대 위에 있습니다. 등대에서 빛을 관리하고 싶다는 윈슬로의 말에 정색을 하며 빛은 자신의 것이라고 윽박지릅니다. 윈슬로는 토마스를 의심합니다. 술을 먹고 이야기한 이전 등대지기의 죽음에도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죠. 참다못한 윈슬로는 토마스를 공격합니다.


 <더 라이트하우스>는 1.81 : 1의 카메라를 사용합니다. 화면 비율이 1 : 1에 가까워질수록 등장인물에 몰입하기 쉽습니다. 주변 배경이 화면에 상대적으로 적게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1801년에 있었던 ”The Smalls Lighthouse Tragedy”를 바탕으로 합니다. Smalls 등대에는 토마스 하웰(Thomas Howell)과 토마스 그리핏(Thomas Griffith)이라는 두 등대지기가 상주했습니다. 하웰이 그리핏에 질려 죽였고, 살인죄로 기소될 것이 두려워 시체를 바다에 유기합니다. 홀로 등대를 관리하던 하웰의 임무가 끝날 때쯤에는 얼굴이 너무나도 상해서 친구들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해당 사건의 여파로 상주하는 등대지기는 세 명으로 늘었습니다.


 <더 라이트하우스>를 보며 여러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직접적인 오마주로는 <가스등>과 <샤이닝>이 보입니다. <가스등>은 ‘가스라이팅’의 어원입니다. <가스등> 속 주인공 잭은 윗집 부인을 살해하고 보석을 훔치려고 합니다. 당시 가스는 건물 공용으로 사용했기에 윗집에서 가스등을 켜면 아랫집의 가스등이 옅어졌습니다. 잭의 아내 벨라는 가스등이 옅어질 때마다 윗집에서 소음이 들린다고 말합니다. 잭은 벨라를 심리적으로 유도하여 정신병을 가진 것으로 몰아갑니다. 마치 토마스처럼 말이죠. 윈슬로가 섬을 벗어나려 하자 토마스는 도끼를 들고 구명정을 부숩니다. 윈슬로는 도망가고 토마스는 도끼를 들고 쫓아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윈슬로가 자신을 향해 도끼를 위협하며 쫓아왔다고 말합니다. 또한, “How long have we been on this rock? Five weeks? Two days? Where are we? Help me to recollect”라며 혼란에 빠뜨립니다. 이때, 윈슬로와 토마스는 식탁 중앙의 조명에서 말합니다. 마치 <가스등>과 같이 빛이 있을 때 혼란이 찾아옵니다.

 <샤이닝>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입니다. 1980년대 명작 공포영화로, 피가 쏟아지는 엘리베이터와 쌍둥이 아이의 섬뜩한 연출로 유명합니다. <샤이닝> 속 조니가 정신증에 걸려 도끼를 들고 문짝을 내려치는 장면을 아시는지요? 해당 장면은 토마스가 윈슬로를 공격하는 장면에서 오마주 되었습니다. 토마스의 일지와 등대에서 조망하는 모습은 <샤이닝> 속 조니와 닮았습니다.

 미술 작품에 대한 오마주도 있습니다. 윈슬로가 꿈에서 죄책감에 시달릴 때, 토마스가 윈슬로에게 빛의 시선을 남깁니다. 이는 사샤 슈나이더의 그림 <Hypnosis>의 재현입니다. ‘Hypnosis’는 최면이라는 뜻입니다. 윈슬로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토마스 모습에 대한 암시입니다. 꿈과 최면을 동일시하여 극이 전개됨에 따라 현실과 꿈을 구분하기 힘들어집니다.


 <더 라이트하우스> 속 등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남성의 성기입니다. 윈슬로는 매트리스에 난 음문 모양의 구멍에서 사이렌 조각을 발견합니다. 윈슬로는 사이렌 조각을 보며 자위합니다. 그가 하는 상상은 사이렌과의 성교입니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등대가 회전하죠. 이는 발기를 상징적으로 제시합니다. 또한, 밤에 등대에서 토마스 웨이크의 자위와 정액을 목격하였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등대는 욕망과 갈망의 상징입니다. 이는 두 번째 의미와 일맥상통합니다.

 등대의 두 번째 의미는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은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인간의 조형물입니다. <더 라이트하우스> 속 바벨탑 위에는 빛이 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가 빛을 독점하죠. 빛은 구원을 상징합니다. 토마스는 자신이 죽인 선원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빛을 통한 구원을 받습니다. 윈슬로가 빛을 관리하고 싶다는 말에 분노를 표한 이유는 구원이 빼앗길까 봐입니다. 결국 윈슬로는 사이렌의 포효와 함께 구원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욕망이 강한 나머지 굴러 떨어집니다.


 윈슬로의 본명과 웨이크의 세례명이 같은 건 의미심장합니다. 윈슬로는 웨이크와의 통성명에서 세례명을 묻습니다. 웨이크의 세례명은 토마스입니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지만 윈슬로의 본명은 토마스 하워드입니다. 하워드는 캐나다에서 목재일을 할 때 진짜 에프레임 윈슬로를 갈고리로 찍어 죽였습니다. 그는 윈슬로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죄책감을 씻을 수 없습니다. 하워드의 꿈에 등장하는 밀려오는 파도 속 목재가 증거입니다. 물에 잠긴 하워드에게 사이렌이 매혹하여 물속으로 끌어당기죠. 이는 하워드가 느끼는 죄책감의 반영입니다.  

 웨이크라고 해서 다른 게 아닙니다. 토마스 웨이크는 애꾸눈 선원을 죽였습니다. 윈슬로가 끌어올린 통발 속에서 찾았죠. 윈슬로가 죽인 갈매기는 눈 한쪽이 멀었습니다. 이는 웨이크가 죽인 선원의 영혼이 갈매기에 스몄으며, “Bad luck to kill a seabird”와 일맥상통합니다.  

 토마스라는 이름은 성경 속에 등장하는 12 사도 중 한 명입니다. 토마스는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롱기누스가 예수의 옆구리에 찌른 창 자국을 확인하고서야 인정합니다. 그래서 토마스라는 이름에는 “의심하는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토마스 하워드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합니다. 그 배후에는 토마스 웨이크가 있죠. 웨이크는 하워드를 의심의 형태로 하여금 일깨워줍니다. 이름 웨이크(Wake)는 ‘깨어난’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원을 얻어 깨어난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뜻이자, 윈슬로를 깨운다는 의미입니다. 영화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거대한 나팔 소리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워드와 웨이크를 1801년에 있었던 실제 사건처럼 두 명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한 사람의 내면으로 읽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웨이크는 토마스 하워드의 마음속 죄책감이고 윈슬로라는 가면은 사건을 덮기 위한 안온함을 의미합니다. 죄책감(웨이크)은 안온함(하워드)을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초반의 하워드는 죄책감에 웨이크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해지자 안온함은 죄책감을 죽였습니다. 윈슬로가 받은 구원은 뒤틀렸고, 빛을 탐한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을 받게 되죠.


 마지막 장면의 에프레임 윈슬로, 아니 토마스 하워드는 갈매기에게 눈과 내장을 뜯어 먹힙니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의 최후와 같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몰래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줍니다. 제우스는 분노하여 프로메테우스한테 독수리에게 간이 뜯어 먹히는 형벌을 내립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죄책감의 영원한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해 갈매기에게 내장이 뜯어 먹히는 윈슬로의 모습입니다. 윈슬로는 웨이크로부터 불을 얻으려는 프로메테우스입니다. 이 복잡한 상징으로 이루어진 <더 라이트하우스>는 결국 한 사람의 마음속 죄책감과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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