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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린 Sep 15. 2022

하루의 낙, 육퇴 후 야식.

육아/육묘 이야기 '오늘의 자식'

(이번 글에는 게임 컨셉으로 시스템 메시지를 넣어보았다.)


[일일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야식타임을 획득했습니다.]

출근&등원 준비부터 아이들 저녁식사와 목욕까지, 하나씩 주어진 일을 해나가다 보면 어느덧 그 하루도 끝이 보인다. 치카하고 잠자기만 남는다. (정확히는 치카 '시키고' 잠 '재우기')

두 돌배기와 다섯 살 어린이는 아직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보니, 그들의 하루일과는 나의 일일퀘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다 마치고 나면 밤 10시가 넘어간다.


아이들이 잠들면 엄마도 회사원도 아닌 '나'의 시간이건만, 얼른 어른들의 저녁식사 겸 야식을 차리거나 배달시켜서 다가 자는 것이 고작이다. 지치기도 하고, 야식 준비하는 데에도 수십 분의 시간이 드니 먹다 보면 한밤 중이어서 그렇다.

초저녁부터 기대해온 것에 비하면 즐기는 시간이 막상 짧은  반주를 곁들여서 그렇기도 하다. 대부분 먹다가 졸려져서 자러 간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야식타임을 건너뛰면 다음 날 아침은 무기력하게 시작된다. 전날 하루종일 일하다가 비로소 끝냈는데, 쉬지도 못한 채 다시 아침으로 리셋된 기분이 드니 기운이 빠져서다. 수많은 부모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아이를 재우다가 잠들면 억울하다.

다소 구질구질하지만 솔직히, 아이를 재우려 함께 누웠는데 한 시간이 넘어가도록 잠들지 않으면 '이렇게 일만 하다가 밥도 못 먹고 내 하루가 끝나나' 싶어 서글플 때도 있다.



[야식을 잘 차려 먹으면 HP와 MP도 잘 회복니다.]

마치 육퇴 후 자유시간의 상징 같은 것이기에, 우리집에서의 야식타임은 정말 중요하고 소중하다. 

그래서인지 가급적 예쁘게 잘 차려먹고 싶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양, 맛, 재료의 다양성과 신선함, 플레이팅과 취식 장소까지. 야식타임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건 참 여러가지 요소인데, 매번 들쭉날쭉 기복이 심하다.


비루할 때에는 햇반에 김이나 컵라면이면 그럭저럭 다행이고, 스팸 굽는 것도 번거롭다. 중간쯤 갈 때는 장난감과 개지 못한 빨래더미 앞에서 널부러진 배달음식을 먹는 정도.

뭔가 정돈됐다는 느낌이 든다면 우리집 기준 중상급 퀄리티 야식이다. 


현실의 야식.
노력한 야식.



음식이 훌륭하고 담겨진 그릇과 식사 장소에도 정성이 담겼으면, 그건 최상급 야식이다. 며칠 전 추석 연휴 마지막 날 밤에는, 벅찬 스케줄을 소화하고 기절하듯 잠든 아이들을 눕히고 모처럼 이사한 집 베란다에서 기분을 냈다. 플레이팅은 신경 못썼지만 '배달미(美)'라고 합리화하니 썩 괜찮았다.

정성이 들어간 한 끼를 스스로에게 대접하는 건 심신 회복에 꽤나 도움이 되는 일이다.


메뉴와 장소, 맛과 양까지 훌륭한 야식. 플레이팅은 배달의 멋이라 생각해본다.



[아이들의 통잠이 곁들여지면, 그 야식타임은 가장 완벽하게 마무리 됩니다.]

생존과 육아를 버무린 하루를 보내고 맞이한 야식타임은 짧지만 강렬한 만족감을 남긴다. 그리고 의식 잃듯 잠이 든 후 다시 제정신이 들었을 때 안방에 아이들이 없으면, 어제 하루는 성공한 삶이구나 싶어 기쁘다. 아이들이 선잠을 자다 깨 엄마를 찾아오지 않고 자기네들 방에서 밤 내내 잘 잤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통잠'이라 한다.)


어쩔 수 없이, 아이가 즐겁고 건강해야 나도 맘 편히 즐거울 수 있다. 아이를 키울 때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잘 먹고 싸고 자는 것'인데,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은 현대에선 더욱 수면의 중요함이 두드러지는 것처럼 (내 눈에는) 보인다.

특히 예민한 우리집 첫째는 먹-쌈-잠의 순환고리가 잘 돌아갈 때와 그렇지 못할 때의 컨디션이 확연하게 달라, 기본의 중요함을 더욱 되새기게 된다.



[(+)일일퀘스트의 소중함도 굳이 짚어봅니다.]

게임에서 일일퀘스트는 반복적인 경향이 있어 다소 지루하다. 하지만 꾸준히 수행하지 않으면 보상 및 험치를 그만큼 덜 받아서, 다른 유저들 대비 상대적으로 뒤쳐지니 안할 수가 없다. (특히 성실성으로 상위 랭커들과의 갭을 메꿔야 하는 소시민 유저들에겐 귀찮아도 소중한 루틴이다.)

현실 삶에서도 일상의 루틴은 귀찮아도 안할 수가 없다는 점에선 비슷하게 느껴진다. (물론 무자녀의 삶에선 생략해도 지장 없는 루틴도 많다...)


그래도 이 거부할 수 없는 현실 삶의 '유자녀 버전 일일퀘스트'는 강제성이 있는 대신, 차곡차곡 성실하게 보상과 경험치를 주고 있다. 하루하루는 티가 나지 않지만 어느새 몸도 마음도 머리도 훌쩍 자라있는 아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아이들의 성장이 내 일퀘의 보상이구나.'

그리고 경험치가 쌓이는 만큼 일퀘의 체감 난이도도 살금살금 낮아진다.


지난 밤에 야식을 먹고 어질러둔 식탁을 치우다 보면 어느새 햇볕이 창문 안에 들고 아이들이 부스럭거리며 잠에서 깬다. 이 하루도 미미하지만 소중한 일퀘 경험치를 얻고, 다시 살아갈 힘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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