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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린 Sep 23. 2022

새벽 베란다의 고양이들과 나

육아/육묘 이야기 '오늘의 자식'

오전 4시. 새벽에 눈이 뜨였다. 

지난 밤 아이들을 무사히(?) 일찍 재우고 남편의 프리랜서 업무 시작을 축하하며 치킨+피자 세트에 한 잔 곁들이고 잠들었는데, 소화가 덜 되어 속이 더부룩해 잠이 깬 것 같다. 애가 하나일 땐 밥 먹듯이 새벽에 깼던 걸 생각해보면, 지금은 그 때보다 조금 늙었든지 두 배로 피곤하든지 혹은 둘 다인가 싶다. 요즘은 새벽에 시계 알람 없인 잘 안 깬다. (애가 울 때 빼고.)


새벽의 시간은 덜 잔 기분이 들어 다소 피곤하지만, 반갑고 소중하다. 애를 키우면서는 좀처럼 갖기 쉽지 않은 '나만의 시간'이 보너스로 주어진 것 같아서다. 상습적으로 새벽에 깰 땐 만성 불면과 스트레스로 인해 느끼지 못했던 기분이다.

다시 잘까 산책을 할까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베란다로 간다.



세 달 전 이사할 집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본 조건이 '비확장 베란다'였다. 아이들과 청소기에 치여 고양이들이 쉬고 생활할 공간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안방 침대 뒤에 콕 박혀 까맣고 노란 쿠션 덩어리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참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그래서 이사 가는 집에서는 고양이들의 별도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가구와 짐을 들이며 이사한 집 베란다가 예상보다 더 넓음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의 로망 같은 예쁜 고양이 놀이터는 아직도 혹은 앞으로도 완성되기 힘들겠지만, 나름 발 뻗고 쉬며 눈치 안봐도 되는 그들만의 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어 기뻤다.

다만 공간을 줬다 보니, 매일 시간을 내서  곳에 들어가 고양이님들을 알현해야 한다는 숙제가 생겼다.


그렇고 그런 이유로, 오늘의 새벽 시간은 고양이들이 있는 베란다에서 쓰기로 했다. 우리집 속 또다른 집이자 섬 같은 그 곳, 베란다에는 나 없이  쉬다가도 나만 보면 마치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표정 연기를 하는 까맣고 노란 두 마리 할머니가 있다.


이사 전 안방 침대 뒤에 숨은 할매들..



밀린 고양이 빗질을 하며 정신없는 낮에는 못하던 생각 정리를 한다. '회사일은 앞으로 이렇게 풀렸으면 좋겠고, 대출이자는 저 돈을 갖다 써서 일단 메꾸면 되겠고, 남편 일할 시간은 그렇게 벌어다 줘야겠구나. 아이들 스케줄은 각각 요렇게 조정해야겠구나.'

더불어 한두 가지 나를 위한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새벽의 시간을 좋아한다. 사람은 나 하나만 있고 여유로운 이 분위기에서는, 평소 미치지 못했던 범위와 깊이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삶의 질을 다듬고 보완해나갈 계획도 세울 수 있다.

하루의 대부분을 잠자며 보내고 새벽에 깨어 있는 게 힘들지 않은 고양이들도 엄마이자 집사인 내 알현시간이 평소보다 길어지니 기쁘다. (얘네들이 말을 안해줘서 자세히는 모르는데, 아무튼 표정은 좋아 보인다.)


어두울 때 초점 안 잡히는 까만 할매, 자세가 요상한 노란 할매.


들쭉날쭉하고 먼지도 조금 붙었던 까만&노란 털결이 매끄러워질 때쯤엔, 밤인지 새벽인지 구분이 되지 않던 바깥 하늘도 파랗게 밝아온다.

간단하게 내부 청소를 하고 고양이들 밥과 물과 간식을 채운다. '나가서 털 좀 떼고 말끔하게 씻은 후에 슬슬 출근 준비해야지' 하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둘째 아이가 웃으며 제 방 문을 열고 나온다.


'역시, 계획대로 되면 그건 내 삶이 아니지.'

상상 그 이상의 진한 희노애락을 안겨준 아이들과 함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출근 겸 등원 준비를 하다 힐끗 돌아보니 고양이들이 자고 있다. 오늘치 애정은 일단 받아뒀기 때문인지 아쉬움 없고 편안해 보인다.

늘 그렇게 속 편하고 여유로우면 좋겠지만 일하는 엄마를 두었으니 사람 아들딸도 고양이들도 매일이 망부석 같은 삶이다.


내 머리 식히러 가서 고양이의 결핍도 채우고 오는 새벽의 짧은 휴가는 그렇게 끝난다.


'안녕, 또 올게. 내 큰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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