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덤불 속 달팽이처럼

by 캐리소
인간은 남을 속일 줄 알뿐더러 때로는 거리낌 없이 속인다는 걸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당연히 개인 차원에서든 종 차원에서든 인간의 본성을 비관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인간에 대한 또 다른 신뢰의 길이 열리며, 그 신뢰는 순진함이 아닌 용기에 기초한다. 나는 배신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을 신뢰한다. 그리고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 그런 신뢰를 통해 당신과 나의 가장 좋은 면이 밖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위험을 무릅쓰고 협력과 타협의 문을 여는 것이다.

- 질서 너머, 조던 피터슨.


인간의 본성을 비관하기 전에 난 나 자신의 본성부터 비관한 적이 있었다.

남을 속이기도 하지만 때론 교묘하게 나를 속였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될 때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정체를 파헤치고 싶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를 이루는 세포 중 어느 것이 변이를 일으켜 나 자신까지도 그렇게 속여야 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 나를 뚝 떨어뜨려놓고 나를 바라봐야 하기 때문에 그것조차도 쉽지 않음을 알았다. 나는 '나'라는 매개로밖에는 나를 볼 수 없다는 핸디캡이 있으니까.


그런데 나라는 작은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천지에 많다는 사실을 백 번 전제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또 있다.

나를 만든 신도 내가 그를 배신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신뢰하는 일 말이다. 그는 내게 손을 내민다. 자신을 도와 세계의 일을 맡기기도 한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건 그의 영이 내 안에 들어와 함께 사는 것이다. 자신의 완전성을 고이 접고 작은 내 속으로 들어와 일하신다. 찌그러지고 일그러지고 심지어 손가락질받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한다는 건 생물이 무생물의 사랑을 받는 것만큼이나 멀고도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이다.


이해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도 있다.

신뢰와 광대함의 끝은 보이지 않는 사랑의 무게를 타 넘어 세계 이 끝과 저 끝을 관통한다.


입장에선 용감하다 못해 무모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그릇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를 담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담고 산다.

결코 어느 만큼 인지 가늠할 수 없는 무게로 젖은 사랑을 가지고 말이다.

적어도 내가 그를 망각하고 내 멋대로 살게 되지 않길.

아니, 내 안에 있는 그가 내가 되어 내 멋대로 살길.





매일 피아노를 스치는 손가락처럼 다정하게 알려주는 저자들의 지혜. 그것을 쫓아가는 일이 꿀송이처럼 달다.

그들은 내 손을 잡고 부드럽게 이끌지만 나는 깡총거리며 이 문장 저 문장을 사방치기 하듯 촐싹촐싹 넘나 든다. 그러다 길을 잃기도 하고 미처 해독하지 못한 문장들에 걸려 한참을 머무르기도 하지만 무지하고 재기 발랄한 소녀처럼 이내 자신의 명랑함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가시덩굴처럼 어렵고 난해한 문장 앞에 서서는 이걸 지나가야 하나 그냥 폴짝 뛰어넘어야 하나, 고민한다.

고민하면 뭐 하나?

지나가건 폴짝 뛰건 가시덩굴을 스쳐야 하는 건 매한가지다.


꼭 필요한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그 문장을 따라 가시덤불 속 자신의 속도를 가진 달팽이의 움직임을 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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