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윈드 Oct 22. 2022

가을날의 어떤 꿈

1

어느 쾌청한 가을날 오후에 한 중년 남자가 숲 속에 난 작은 오솔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가 사는 동네의 뒤편의 낮은 야산에는 나뭇잎들이 조금씩 물들어가며 한가위를 맞이하는 가을을 느끼게 해 줍니다. 잠시 뒤를 돌아보는 그의 눈에는 흰 구름이 흘러가는 파란 하늘 아래로 높은 아파트와 층층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다시 몸을 돌려 천천히 걷는 능선 길에는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나뭇잎 사이로 이름 모를 열매들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문득 그의 눈에 노르스름하게 익어가는 다래가 눈에 들어옵니다. 손을 뻗어 한 알을 따먹어보니 새콤한 맛과 함께 단맛이 느껴집니다. 약간 경사면에 열려있는 다래를 따려던 그는 그만 발을 헛디뎌 비탈에서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비탈진 언덕 아래의 평평한 곳은 처음 와보는 곳으로 방향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잠시 두리번거리는데 멀리 초가집 한 채가 보입니다.       


"이곳에 이런 초가집이 있다니?"     


그 동네에 오래 살아 산책길에 익숙하던 그는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그는 혹시 새로 생긴 카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갑니다.      


초가집의 마당에는 작은 평상 위에서 상투를 튼 하얀 백발의 노인 한 분이 곡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는 뭔가 알 수 없는 신비한 느낌마저 드는 노인께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이곳이 어디인가를 묻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대답 없이 빙그레 웃으며 손짓으로 올라와 앉기를 청합니다. 그러고는 작은 잔에 술을 한잔 따라주며 마셔보라고 합니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니, 여러 가지 과일향과 함께 가벼운 알코올의 느낌이 입안 가득 달콤하게 퍼져옵니다. 한 잔의 술에 입안이 황홀해지는 느낌마저 듭니다. 그가 빈 잔을 내려놓자 한 잔을 더 따라주며 노인이 대답합니다.      


"젊은이, 이곳은 매작홍주촌이라네. 내가 그리 이름을 붙였지."     


뭔가 독특한 이름이라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중년의 아저씨에게 젊은이라 부르는 노인에 대해 더 궁금해졌습니다. 노인의 고풍스러운 말투를 느끼며 향기가 나는 술을 음미하듯 마시고 다시 묻습니다.      


"그런데 어르신은 혼자 사시나요?"

"아니네, 네 여인들과 함께 살고 있다네."

"네 여인요?"

"그렇다네. 나의 사랑스러운 여인들이지. 만나 보겠는가?"     


호기심이 가득 해지는 그의 눈빛을 읽었는지 노인은 술잔을 내려놓고 손바닥을 딱딱 치며 누군가를 부릅니다.      


"거기들 있느냐?"     


그러자 초가집 뒤편에서 어떤 대답 소리가 나더니 색색의 한복을 입은 네 여인이 걸어 나옵니다. 한결같이 미인이라고 느끼는 순간 그녀들이 벌써 눈앞에 서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매작홍주라네."      


그를 보고 웃으며 여인들을 가리키던 노인이 그녀들에게 '손님께 인사를 올려라'라고 하는데 목소리에는 다정함이 묻어납니다. 그러자 밝은 자주색이 감도는 옷을 입은 여인이 먼저 한 발을 내디디며 미소와 함께 인사를 합니다.


"소녀, 매자라 하옵니다."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그녀의 갸름한 붉은 얼굴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합니다. 사근사근하게 이름을 말하는 붉은 입술은 달콤한 느낌마저 듭니다. 그가 대단한 미인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보랏빛 여인이 인사를 합니다.     


"소녀는 좀작살이라 하옵니다."     


이름이 조금 독특하다고 느꼈지만 마치 작살처럼 갸름한 초록 옷을 보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키가 크고 날씬한 그녀는 마치 보랏빛 보석처럼 빛이 납니다. 그녀가 사뿐하게 움직여 한발 뒤로 물러서자 이번에는 세 번째 여인이 인사를 합니다.     


"소녀는 낙상홍이라 불러주십시오."     


발그레한 얼굴이 동글동글한 그녀는 온통 붉게 반짝입니다. 살짝 고개를 들며 마주치는 눈동자는 초롱초롱 빛나는 듯도 합니다.      


"소녀, 박주가리이옵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는 그녀는 갸름하지만 약간 통통한 몸집에 여드름이 난 듯도 한데, 뭔가 독특한 매력이 느껴집니다. 그녀들이 공손하게 인사를 마치자 노인은 술을 한잔 더 따라주며 그에게 말을 건넵니다.      


"이 아이들은 나의 딸 들이라네. 어떤가? 보기에 괜찮은가?"

"아, 따님들이시군요. 다들 대단한 미인이십니다."     


흡족한 표정으로 술을 한잔 마신 노인이 초록빛이 감도는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빈 잔을 가볍게 내려놓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손을 들어 은빛으로 반짝이는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그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자네 이 아이들의 재주를 보고 싶지 않은가?"


노인에게 두 손으로 술을 따르던 그는 어떤 기대감에 반사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네. 보고 싶습니다!"     


향기롭고 달콤한 술을 세잔이나 마신 그는 빛이 나는 듯한 네 명의 미녀들을 보니 더욱 황홀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들은 벌써 마당에 깔린 멍석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아마도 큰 언니인 듯한 매자가 부채를 들고 판소리 춘향가 중의 '사랑가'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막내인 듯한 박주가리가 북을 치며 추임새도 넣습니다. 뒤편에서는 좀작살과 낙상홍이 가볍게 춤을 추며 아름다운 선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너울너울 손짓을 하며 부르는 매자의 노래는 훌륭합니다. 붉게 반짝이는 그녀의 표정도 사랑에 빠진 여인 같습니다. 그녀들의 노래와 춤을 보던 그도 점점 꿈꾸는 듯한 황홀한 표정이 되어갑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노래와 춤이 끝나자 그는 열정적인 박수를 보냅니다. 그런데 노래를 마친 그녀들이 이번에는 각각의 악기를 준비합니다. 매자는 꽹과리를, 좀작살은 장구를, 낙상홍은 북을 그리고 박주가리는 징을 치며 사물놀이를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들이 만들어내는 신명 나는 리듬에 그의 어깨가 들썩여집니다. 그러자 노인은 어느덧 내려간 마당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그도 따라 내려가 같이 어깨춤을 추는데 스스로 움직이는 듯한 몸짓에 저절로 흥겨워집니다.     


그와 노인이 함께 한바탕 춤을 추고 다시 자리에 앉자 그녀들이 이번에는 부채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커다란 부채들이 펼쳐졌다 접혔다 다시 펴지며 나비들이 너울너울 날갯짓을 하는 듯합니다. 산들바람의 리듬에 맞추어 빙글빙글 도는 그녀들의 춤사위에는 흥이 가득해지고, 그녀들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도 춤을 추며 날아오릅니다.     


아름다운 그녀들의 춤을 보며 그는 노인이 권하는 술을 한잔 더 마십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취기가 올라오며 흐려지는 눈앞으로 나비들이 날아오는 느낌과 함께 그만 잠이 들고 맙니다.      


2

문득 잠에서 깨어나자 백발 노인도 아름다운 여인들도 초가집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따스한 가을 햇살만이 벤치에 앉아있는 그를 비추고 있을 뿐입니다.       


"꿈을 꾼 것인가?"     


하지만 그 꿈은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정말 잠시 술에 취해 깜박 졸다가 깨어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벤치에 앉아있었고 취기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의 바지자락에는 풀숲의 부스러기가 묻어있습니다.


그는 벤치에서 일어나 뒷산의 산책길을 걸어봅니다. 그곳에는 그가 다래를 따려다가 부러뜨린 작은 참나무 가지가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미끄러져 내려가며 갈대들을 땅에 눕혀버린 흔적들도 남겨져 있습니다.


그가 조심조심 비탈길을 내려가니 집을 짓기 알맞은 장소가 있는데 초가집은 보이지 않습니다. 풀밭에는 그저 초록색 이끼가 가득한 흰 줄무늬의 검은 바위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습니다. 커다란 바위의 움푹 파인 곳에는 맑은 물이 고여있고요.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합니다. 숲에는 작은 나무와 큰 나무의 잎들이 가득하고 아래쪽에는 여러 가지 풀들의 작은 꽃도 보입니다. 그리고 작은 잎이 달린 덩굴들도 이리저리 굽어지며 뻗어가고 있습니다.     


문득 그의 눈에 둥그스름한 자주색 잎 사이에서 붉게 익어가는 갸름한 모습의 매자가 보입니다. 그가 반가운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웃으니 그녀도 반짝반짝 빛을 냅니다. 혹시나 해서 다시 주변을 들러보니 가까이에 보랏빛으로 익어가는 좀작살나무 열매도 보이고 낙상홍도 붉디붉게 반짝이고 있습니다. 어느 나무의 가지를 타고 줄기가 뻗어 나온 연두색 박주가리는 연한 자줏빛을 띠어가고 있습니다. 마치 대자연의 숨결 같은 산들바람에 아직도 그녀들의 춤사위가 느껴집니다.     


그는 붉게 물들어가는 매자에게 다가가며 친숙한 느낌으로 인사를 건넵니다.      


"매자 씨,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어찌 된 일인지 그녀가 말을 합니다. 그런데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그녀도 그를 아는 듯합니다. 그는 그도 모르게 조금 전의 느낌을 그녀에게 전합니다.      


"저번에 들려주신 노래는 황홀했습니다."

"어머나, 감사해요. 듣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다시 불러 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합니다. 그는 미소 띤 얼굴을 살짝 돌리는 모습도 매혹적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언니 같은 매자의 가까이에서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는 좀작살나무에게도 인사를 건넵니다. 그녀는 여전히 가볍게 춤을 추고 있습니다.      


"좀작살 씨의 춤은 너무 멋지세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긴 치맛자락을 살짝 잡아 올리며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감사의 인사를 건네 옵니다. 그녀의 우아한 자태에 그는 또 할 말을 잊은 채 바라보기만 합니다.      


    

그 옆의 낙상홍은 더욱 붉어져 있습니다.       


"낙상홍 씨는 이름이 예쁘네요. 아버님이 지어주셨나요?"

"네, 맞아요. 서리가 내릴 때까지 오랫동안 붉게 살아가라고 그리 지어주셨지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반짝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에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오랫동안 그 아름다움을 곱게 간직하시길요."

"어머나! 어머나!"     


붉은 얼굴이 더욱 빨개지는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감탄사만 되풀이합니다. 그 모습에 그는 아마도 셋째 딸이라서 이렇게 매력적이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노랗게 물들어가는 잎을 바람에 살랑이며 박주가리가 다가옵니다. 가녀린 줄기에서 커다란 열매를 키워가는 그녀에게서는 강인한 모습마저 느껴집니다. 그녀가 먼저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어머나, 또 오셨네요? 반가워요."     


그는 아까의 꿈이 꿈이었는지 아니면 사실이었는지를 확인해 보기로 합니다. 짐짓 그녀를 놀리듯 대꾸를 해봅니다.      


"아, 네, 그런데 저를 아시나요?"     


그녀가 생글거리며 대답을 이어갑니다.     


"물론이죠. 지난번에 저희 집에 오셔서 아버님과 약주도 한잔하시고 저희 자매들의 공연도 보셨잖아요?"

"아, 맞아요. 정말 황홀한 시간이었습니다."

"저희도 만나 뵈어 반가웠습니다. 자주 놀러 오세요."     


그녀들에게 둘러싸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는 다시 행복감에 빠져듭니다. 그런데 문득 '지금이 꿈일까? 아니면 지난번이 꿈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내 '둘 다 꿈이어도 좋아!'라고 생각하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해집니다.          

이전 20화 박주가리, 그 미소와 향기 그리고 인연은 이어지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