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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윈드 Oct 21. 2022

릴케의 가을날, 산책자의 가을날

화사한 가을 햇살이 참 좋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초가을의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아 쾌적합니다. 꽃향기가 실려오는 달콤한 봄바람도 좋았지만 이제 붉은 열매들을 스쳐오는 선선한 가을바람도 좋습니다.       

그런데 길에 나와보니 가을 햇빛은 생각보다 뜨겁습니다. 이 또한 과일의 단맛을 더하는 더위겠지요. 문득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이 떠올라 읽어봅니다. 그리고 어느 구절은 반복해서 음미하게 되는군요.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명해 주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나날을 베풀어 주소서,  

열매들이 무르익기를 재촉해 주시고,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감미로움이 깃들게 해 주소서.     


가을은 '릴케의 시와 자신에 입 맞추는 시간'이라 하셨던 김현승 시인도 생각납니다. 이제 점점 익어가는 열매들과 함께 가을이 다가올수록, 우리도 스스로에게 입맞춤을 하며 마음과 생각도 더 깊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의 낙상홍도 거의 다 붉어졌습니다. 가을 햇살은 뜨겁게 비치는데 그늘 쪽의 열매들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뜨거운 얼굴을 식히고 있습니다. 파란 하늘 아래 초록의 잎새 사이에서 조용히 익어가는 붉은 열매가 따뜻한 느낌입니다. 어쩌면 가을은 이렇게 조용한 미소로 다가오는 듯합니다.      


     

색깔이 밝아져 가는 초록 잎 사이에 박주가리 열매가 숨어있습니다. 누가 잎인지 누가 열매인지 쉽게 분간이 안되는데 바람에 살랑이는 열매가 손짓을 하는군요. 흰 구름이 흩어지는 하늘 아래 유유자적한 모습입니다. 머리를 맞대고 서로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한 쌍의 새를 보는 듯도 합니다.       


이곳의 매자는 웬일인지 조금 쓸쓸한 모습입니다. 잎은 벌써 마르기도 하고 많지 않은 열매들의 피부는 많이 거칠어져 있네요. 하지만 이제 잎들이 지고 비록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더라도 열매들이 외롭지는 않을 듯합니다. 이 가을을 맞아 스스로 붉어지며 안으로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기 때문이죠.      


좀작살나무의 점점 짙어지는 열매의 색깔과 함께 가을이 점점 다가오나 봅니다. 매끈한 초록 잎 사이마다 보라색 열매들이 반짝입니다. 그런데 벌써 몇 알은 떨어져 땅으로 돌아가기도 했군요. 초록과 보라가 만들어내는 짙은 색감의 대비가 이 계절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아름답게 익어가는 가을을요. 

     

햇살이 가득한 정원의 그늘에서 가을의 분홍색 미소를 봅니다. 이질풀 꽃이 환하게 웃으니 더욱 보기 좋네요. 햇빛에서도 분홍의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선명해지는군요. 분홍색 개여뀌도 햇빛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어른이 된 것인 양 수염 같은 솜털이 몇 가닥 나있군요. 


한낮의 햇살은 뜨겁지만 나무 그늘은 시원합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피어있는 안젤라 장미의 분홍색은 더욱 화사한 느낌입니다.      


  

천천히 걸어 그늘 쪽으로 걸으니 부드러운 바람결이 시원합니다. 두 송이의 닭의장풀 꽃은 마치 언니가 동생을 업고 있는 듯한데 둘 다 활짝 웃고 있군요. 벌이 다녀갔는지 파란색 꽃잎에는 노란 꽃가루가 조금 흩어져있습니다. 그런데 영산홍의 잎은 벌써 조금씩 붉어집니다.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가을 아가씨의 볼이 점점 붉어지는 듯합니다. 야광나무의 열매는 초록의 모습이 순수이고 빨갛게 익은 모습이 정열이라면 지금의 모습은 잔잔한 미소를 담은 수줍음 같습니다. 이제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생각이 깊어지듯 색깔도 진해지겠지요. 햇살은 아직 많이 남아있고 바람은 또 불어올 테니까요.     


나무 그늘에 앉아 바람에 흔들거리며 익어가는 열매들을 바라보니 더욱 시원하네요. 햇살이 가득한 가을 하늘은 파랗고 흰 구름은 멀리 흩어지는군요. 브람스가 듣고 싶어 집니다. 엘렌 그리모의 연주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전 악장을 열매들과 함께 들어보기로 합니다.      


팀파니의 부드러운 울림과 함께 시작되는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장중합니다. 각각의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멜로디는 힘차기도 하고 다시 부드러워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을 햇살을 받으며 반짝이는 열매처럼 피아노의 선율이 이어지는군요. 가을바람은 산들 하게 불어오고 산책자는 달콤한 선율과 함께 아름다운 계절 속으로 점점 빠져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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