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라이프로 출근하다

by 뮤즈

남편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를 마치고 차로 돌아왔다.

“중국에 가서 몇 년 동안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네”

2015년 여름이었다. 남편이 경기도 파주에 연수가 있어 해 뜨기 전 새벽에 같이 출발해 양평의 두물머리에 도착했다. 사진작가들의 단골 출사지로 남한강과 북한강의 두 물이 합쳐지는 곳이라는 두물머리, 물안개 피는 고요한 아침의 두물머리를 보고 남편은 파주로 출발했고 나와 아이들은 양평역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갔다. 지방에 살았던 우리는 서울에 있는 경복궁, 남산타워에 가보며 EBS 초등 여름 방학생활에 나온 곳을 체험 학습했다. 서울에서 이틀 밤을 보내고 남편이 연수를 마치고 나올 때 파주로 가서 합류해 내려오는 고속도로에서 중국에 갈지도 모른다는 전화가 왔다.

아이들이 3살, 4살 때 브라질에 가서 살 수도 있었다. 그때 우리는 솔직히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비행기 한 번으로 절대 가지 못하는 지구 반대편 남아메리카까지 가서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만약 그때 브라질에 가서 몇 년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Don’t cry for me Argentina’의 아르헨티나도 가보고, 이과수 폭포도 보러 가보았겠지? 하면서 말이다.

이번에는 가야할지도 모른다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 남편과 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각자 앞으로 어찌해야 될지 생각하느라..

그날로부터 1년 뒤 우리는 중국 베이징에 왔다.


중국살이는 4년 예정이었는데, 직장을 그만두고 가야 한다면 나는 중국행을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이고 못 간가고 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나의 직장은 배우자가 해외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 휴직을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그 제도의 이름은 ‘동반휴직’이고 지금 현재 규정으로는 최장 6년까지 가능하다. 최대한의 수익과 실적을 내야 하는 기업의 오너라면 쉽게 허용할 수 없는 제도다. 6년이나 근무를 쉰 경력 단절의 직원을 다시 채용해 줄 인내심 있고 여유로운 오너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국가는 그 경력단절의 시간을 보장해주어 나는 ‘동반휴직’을 내고 중국으로 왔다.

나를 알았던 사람이 없는 곳, 매일 출근을 하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 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동반휴직’을 신청하며 자필로 적었던 서약서 3번 ‘공무원 신분으로서 품위유지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가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고, 직장을 쉬면서 가족들과 해외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국가가 고마워 이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대충 살 수는 없었다. 중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가서 다시 직장에 나갈 수 있게 된다면 공백을 매울 수 있는 무언가 를 하여야 했다. 경력단절의 4년, 이곳에서 나의 중국 이름이 적힌 자격증이나 수료증을 1년에 1장씩, 4장을 받아보자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나는 매일 베이징 라이프로 출근했다.

남편이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고, 아이들이 새로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나에게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리하여 일단 생활을 위해 중국어를 배우는 학교에 등록해 다녔다. 매일 아침 중국어를 배우는 학교에 출근했다. 잘하고 싶고 열심히 하고 싶어 일상의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어 살았고, 피곤해도 카페인을 보충하고 잠을 푹 못 자며 버텼다. 첫 학기를 마치고 나는 수료증과 반 24명 중 가장 성적이 좋은 2명에게 주어지는 장학증서와 장학금을 받았다. 성적도 중요하지만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출석률이 98% 이상 되어야 했다. 결석을 하지 않고 거의 매일 학교에 가야 했다.

다음 학기가 시작되기 전 방학에는 국제 운전면허증이 통용되지 않는 중국이라 시험을 봐서 운전면허증을 땄다. 그리고 다음 학기도 학교에 출근하듯 다녀서 수료증과 장학증서를 받았다. 학교에 3학기를 다녔고 계획했던 증서는 4장보다 조금 더 여유로이 채웠다. 그 증서에는 모두 나의 중국 이름이 적혀있다. 나는 대한민국 아줌마와 공무원의 서약을 걸고 매일 베이징 라이프로 출근했다. 휴직 중이었지만 꿈을 가지고 한걸음이라도 나아가고 싶었다. 나에게 좀 쉬어가며 살지 왜 그리 힘들게 지내냐고 경계하고 멀리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많이 외롭고 힘들었다. 그때 나의 유일한 낙은 다음날 아이들도 나도 학교에 가지 않고 남편도 출근하지 않는 금요일 저녁, 맥주를 마시며 보고 싶던 한국 드라마나 중국 드라마를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국 생활이 적응이 되어 여유를 가지려 할 때 병이 찾아와 아무것도 못했던 시간도 있었다. 그 뒤부터는 내가 등한시했던 체력을 키우고 몸을 돌보며 지냈다.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려보며 마음근력도 키웠다. 체력이 돌아오지 않아 숨 고르기를 오랫동안 하였다.


코로나로 인해 예정된 시간보다 더 길게 베이징 라이프에 출근했다. 베이징의 옛 거리 후통을 걸으며 사람들의 사는 모습도 들여다보고 서점과 도서관에 도장 찍기를 하러 가고 공원도 거닐고 여러 카페에 가서 창을 바라보며 커피도 마셔보았다. 큰 대륙의 식재료와 생필품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구매하고 중국음식도 만들어 보았다. 이제 6년간의 베이징 라이프를 기록하고 정리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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