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간의 자가격리가 해제된 날이었다.
집안에서만 지내다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몇 번의 복식호흡으로 14일 만큼의 바깥공기를 들이마셨고, 양산과 선캡으로 보호하던 이곳의 강렬한 봄햇살에 그날은 피부를 무방비상태로 노출시켰다.
감옥에 있다 나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물론 나는 집안에서는 자유롭게 지냈으나 격리하던 지인들끼리 했던 위로의 말은 ‘감옥에서는 정해진 시간밖에 나가 산책이라도 하지 우리는 어떻게 잠시도 나가지 못하냐였다.’ 시간은 흘러 격리 해제 후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봄은 술래잡기하듯 저만치 앞에 달려가고 있었다.
프리마 스콜라 알바 에스트
첫 수업은 휴강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는 평소와 달리 잉여 시간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은 여러분에게 그냥 주는 시간이 아닙니다. 생각지도 않게 생긴 이 시간 동안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운동장으로 나가 봄기운에 흩날리는 아지랑이를 보는 겁니다.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
격리 중에 읽은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 속 문장이다.
나에게도 잉여시간이 주어지는 듯했다.
책을 읽는 계절, 요일, 시간대, 그리고 그때의 상황에 따라 책의 문구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달라지는데 이때는 한창 봄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3월이었다.
해가 뜰 때도 해가 질 때도 창 밖을 바라보며 정말 나가고 싶었다. 격리 해제된 날 집 주변의 호수를 세 바퀴 돌아보았다. 파란 하늘, 반짝이는 호수, 호수 안을 헤엄치는 알록달록한 잉어들, 다리 위에서 먹을 것을 뜯어 잉어들에게 던져주는 아이, 그리고 그 옆에 생기 가득한 연두 빛으로 늘어뜨려진 버드나무, 흐드러진 붉은빛의 홍매화, 보기만 해도 무릉도원의 달콤한 복숭아가 생각나는 분홍 복사꽃, 모두 ‘봄날의 아지랑이’였다. 그리고 그 봄 내 마음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그전에는 곁에 있어도 느끼지 못했던 베이징의 봄을 어딘가에 담아보고 싶었다. 지난 1월 춘절(중국의 음력설) 전 이주일 뒤에 보자며 인사하고 왔던 아이리스가 떠올랐다. 아파트의 출입 규제가 완화되어 화실도 제한적으로 개방한다는 연락이 오자마자 달려갔다. 다시 재회한 아이리스를 보며 그간 혼자 두어서 미안한 마음에 베이징의 봄을 담아보기로 했다. 수소문해서 베이징의 붓꽃을 보러 찾아다녔다. 보고 또 보며 머리에도, 마음에도, 카메라에도 담았다. 바깥이 온통 연두와 초록의 신록의 계절이라 아이리스의 잎을 위한 색을 만드는 것이 창 밖의 자연을 마음에 담아 캔버스에 스며들게 하는 과정이었다. 어, 이 색 아닌데 하면서 색을 섞고 또 섞어가며 나는 자연을 창조하였다. 20g도 안 되는 붓의 터치 하나하나에 베이징의 봄을, 나의 베이징 라이프에 대한 진심을, 내 마음에 피어오른 아지랑이를, 장기화되는 코로나 펜더믹으로 잃어가는 열정을 불어넣고 싶었다.
이렇게 완성된 나의 아이리스는 ‘2020년 베이징의 봄’이었다.
지난해 2021년 3월, 나무의 새순이 돋기 시작하는 베이징의 봄을 다시 맞으며
다음 해에도 이곳에서 봄을 맞을 수 있을까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함에,
지금 이 순간을 성실히 누리고 싶었다.
고흐는 조카의 탄생을 기뻐하며 자신의 이름을 딴 조카를 위해 침실에 걸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아몬드 꽃이 만발한 커다란 나뭇가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고흐는 1890년 2월 15일 사랑하는 어머니께 희망을 가지려 노력한다는 편지를 적었다.
그래서 나도 어쩌면 살면서 마지막으로 보게 될 베이징의 화사한 봄과 희망을 담아 파란 하늘 속 하얗게 빛나는 아몬드 꽃을 그려보고 싶었다.
실제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몬드 꽃을 열심히 찾아보고 또 보았다. 고흐전에 가서 사 온 아몬드 꽃 머리핀을 일부러 하고 다니고 잘 때는 손목에 끼고 잤다.
베이징의 화사한 봄을 담아보고자 한 소박한 희망으로 시작한 파란 하늘 속 아몬드 꽃은 나의 초보 그림실력으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완성에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의 아몬드 꽃은 베이징의 영춘화, 홍매화, 복사꽃, 목련, 개나리, 벚꽃, 붓꽃, 배꽃, 이월란뿐만 아니라 재채기 나는 꽃가루도, 신록의 여름도, 화려한 대륙의 장미도 베이징의 뿌옇게 흐린 하늘도, 파아란 왕징 소호가 보이는 하늘도 담겨 있다. 완성은 멀고 지치기도 해 여름에는 잠시 수국을 그리며 돌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돌아오니 반갑고, 9월 초에 보는 아몬드 꽃은 다르게 보였다.
나의 아몬드 꽃은 나뭇잎이 노랗게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초가을과 황금색의 가을도 담겨있고 갑작스러운 화상 상처로 그림 작업을 멈추었던 시간들도 담겨있다. 상처가 나아져 다시 화실 가는 길의 만연한 가을과 입동의 함박눈과 겨울이 시작된 베이징의 초겨울까지 담겨버렸다. 인고의 시간들이 담겨있는 그림이다.
이렇게 완성된 나의 아몬드 꽃은 '2021 베이징의 사계'이다.
그렇게 나는 베이징의 자연을 담아보고 싶었다.
지금 놓여있는 그림들을 바라보면 붓을 들었던 그 때 베이징의 공기와 하늘, 잎과 나무의 색, 길가에 피어있던 꽃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지난봄 한국에 돌아가서 사용할 가구를 보고 주문하러 갔었다. 결정 장애인 나에게는 쉽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선택의 일 순위는 볼수록 베이징의 자연이 느껴지는 가구였다. 지금 그 가구 안에는 중국에서 사 온 추억이 가득하다. 그림과 가구에 베이징의 자연을 담아와 나는 베이징 라이프를 천천히 보내주어도 될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