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전라북도 무주의 오지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지금도 길이 험하고 가구수가 얼마 안 돼서 버스도 안 다니는 곳. 차 없으면 30분은 산길을 넘어 걸어가야 하는 곳이다.
아빠는 6.25 전쟁이 나기 전 1948년 그곳 오지에서 태어났고 3살이 되던 해에 전쟁 통에 어머니를 잃었다. 아빠가 7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그 험한 산길을 넘어 집으로 돌아오던 중 산길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고아가 된 아빠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어린 나이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살았다. 아빠는 10대 후반 서울로 상경해 공장을 다니다 24살이 되던 해에 같은 요꼬공장(옷 짜는 공장)에서 일하던 18살인 엄마를 만나 그해 겨울 나를 낳았다.
둘은 요꼬공장에서 일을 하며 열심히 살았고 2년 뒤 결혼식도 올렸고 내 동생도 낳았다. 그렇게 아빠는 수유리에 자신의 집을 장만하고 요꼬공장도 하나 차렸었다. 그러나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 공장이 망했고 우리는 그 해 겨울 외가댁 근처인 경기도의 작은 면 소재지 동네로 이사를 했다.
새로 이사 온 셋집은 동네의 맨 끄트머리집 부속건물로 가게가 딸린 아주 아주 작은 단칸방이었다. 아빠는 요꼬공장을 하며 간질 발작을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는 건 가게가 딸린 집으로 이사를 하고 아빠가 간질 발작을 자주 일으켰고 그 뒤로도 오랫동안 한 달에 두세 번 발작하는 모습을 봐야 했다. 그렇게 발작을 하면서도 아빠는 술을 매일 먹었고 담배를 달고 살았다. 술에 안 취해 있는 아빠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침에는 늘 화가 나 있는 무서운 표정으로 우리 앞에서 담배를 태워 대는 무뚝뚝한 아빠가 있었고, 해가 지면 자신의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술에 취해 신세 한탄을 하는 아빠가 있었다. 어린 딸에게 "아빠는 오래 못살고 일찍 죽을 거야."라는 말을 하곤 했다. 어린 나이부터 난 '나의 아빠는 빨리 죽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이사 후 아빠는 엄마보다 세 살 위, 아빠 보다 세 살 아래인 외삼촌이 사장인 시내의 조그만 보일러 가게에서 보일러 설비 일을 배우며 새 일을 시작했고 엄마는 구멍가게를 시작했다. 어린 나는 학교를 다녀오면 엄마와 함께 구멍가게를 지켜야 했다. 그 구멍가게는 왕비들의 능이 있는 길에 있었다. 그래서 주말이면 능으로 놀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엄마는 어느 해부터 도토리묵을 만들어서 묵무침을 팔았고 주말이면 놀러 오는 사람들이 엄마의 도토리묵무침에 막걸리를 사 먹었다. 장사는 아주 잘 됐다. 그래서 나는 국민학생이었을 때부터 금요일, 토요일 저녁이면 팔이 아프게 도토리묵을 쑤어야 했고 주말엔 가족이 모두 장사를 해야 했다. 아빠도 주말 장사를 도왔던 것 같은데 어느 날 손님이 계산서를 작성해 달라고 하자 무학력자여서 글 쓰는 게 서툴렀던 아빠는 얼마를 먹었다고 더럽고 치사하게 계산서를 끊어달라고 하냐며 손님과 대판 싸우고 그 뒤로 가게 일을 잘 안 도왔다.
80년대 제법 일거리가 많았던 외삼촌 보일러 설비 가게에서 아빠는 설비일을 잘했다. 어려서부터 일로 잔뼈가 굵은 아빠는 눈치도 빨랐고 일머리도 손재주도 제법 좋아서 설비일은 잘했는데 성격이 불같고 화가 많았던 아빠는 같이 일하는 주변사람들과 자주 다퉜고 늘 불평불만이 많았고 술에 취해 집에 오면 우리 앞에서 본인을 서운하게 했던 사람들을 향해 험한 쌍욕을 해대기 일쑤였다. 어린 나에게 아빠는 험하고 무서운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