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기 위해서였던 나날>, 昀[햇빛 윤]
처음엔 단순히 사채업자들이 부르는
터무니없는 이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합법적인 이자만 계산해 갚아 나가도,
돈은 줄지 않았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전화, 입금, 협박, 타협 그리고 침묵.
끝이 없었다.
그 무한 반복 속에서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하루는 엄마가 내 방 문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두툼한 돈다발이 들려 있었다.
“모아둔 돈을 다 써서 빌려왔어.”
그 말에 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니, 우리 집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나는 우리 집이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묵직한 돈다발이
몇 분도 되지 않아 내 손에서 사라져 버렸다.
내 손끝을 떠나갈 때마다,
사채의 손이 내 목을 천천히 조여오는 것 같았다.
엄마는 돈을 가져올 때마다
평소엔 들어오지도 않던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늘 하소연을 했다.
“이번엔 정말 마지막이야.”
"아빠가 회사에서 급하게 돈 빌렸대."
"아빠가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었어."
그 말은 이제 소음처럼 들렸다.
들리지 않는데, 들려서 아팠다.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닌데
왜 내 가슴이 이렇게 무거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동생이 또 자살 시도를 할까 봐 걱정이 된다며
정작 동생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은행 같았다.
돈이든 마음이든, 원하든 원치 않든
늘 나를 통해 흘러가야만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누군가 나의 마음속 금고를 부순 기분이 들었다.
엄마가 또 내 방 문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통장’이 들려 있었다.
그 표정은 설명할 수 없었다.
슬픔, 죄책감, 절망, 미안함
그 모든 것이 한 얼굴에 겹쳐져 있었다.
나는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내 결혼 자금인 걸 엄마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통장을 들고나갔다.
나는 엄마가 나간 현관문을 보며 얼어붙은 듯 서 있던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명하다.
왜 얼어붙었던 걸까.
내 결혼 자금을 동생의 사채 빚으로 쓰게 되어서?
절대 아니었다.
딸의 결혼식을 위해 준비해뒀던 결혼 자금이
나에게도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가족들과 새집으로 이사를 할 때도
내 방에 들어가는 가구도 다 내 돈으로 사야 했었다.
같이 살기 위해 용돈이라는 단어에 포장된 월세도 내야 했었다.
심지어 나의 처지를 아는 지인들도
"너 결혼할 때라도 받을 거 다 받고 나와. 마음 약해지지 말고."
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내 이야기를 앞에서부터 읽어주신 분들이라면
엄마, 아빠라는 존재가
특히 엄마가 나에게 얼마나 물질적으로도
계모처럼 굴었던 거를 알지 않은가.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그 통장에 얼마가 들어 있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묻고 싶지도 않았다.
나의 결혼식 자금이 동생의 빚으로 사라진다는 사실보다
“나는 결국, 어떤 방식으로도 이 가족에게 도움을 받지 못하는구나.”
그 사실이 더 아팠다.
그날 밤, 엄마가 돌아와서 말했다.
“아까 통장 너 결혼 자금이었어.”
나는 짧게 대답했다.
“알고 있었어. 나 돈 없어도 돼.”
엄마는 울먹이며 말했다.
“그래도... 딸 결혼인데, 떵떵거리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떵떵’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을 후벼팠다.
그건 나를 위한 떵떵거림이 아니었다.
딸을 시집보내는 ‘엄마 자신’을 위한 체면의 떵떵거림이었다.
나는 모든 게 엄마 탓인 것만 같았다.
동생이 저렇게 된 것도,
내가 이렇게 독해진 것도,
모두 사랑받지 못한 탓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감정의 화살은 결국 동생에게 향했다.
동생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자고 있던 동생은 ‘또 시작이네’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 표정이 너무 미웠다.
나는 동생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 순간, 동생의 눈빛이 변했다.
순식간에 살기가 돌았다.
엄마와 아빠가 다급히 뛰어와
동생을 붙잡아 방 밖으로 못 나오게 막았다.
엄마, 아빠도 차마 동생의 핸드폰을 뺏지 못하다가
내가 나서자 이때다 싶어 나를 도왔다.
그리고 내 손에는 마침내,
진짜 ‘판도라의 상자’가 쥐어졌다.
열어보니
읽지 않은 수백 통의 메시지,
거짓말로 덮인 금융 앱의 내역,
사진첩 속 지워지지 않은 흔적들.
그 안에는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방금 빌린 사채 내역,
인터넷 방송을 하는 여자에게 보낸 후원금 내역,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입을 막지 않으면, 내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내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됐다.
나는 내 영혼을 태워가며
동생을 살리려 싸웠다.
그런데 동생은 내가 핸드폰을 빼앗기 직전까지도
또 다른 사채를 쓰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듣자마자
아빠는 결국 무너져 내렸다.
거실 한가운데서 주저앉아,
마치 신 앞에 용서를 구하듯 무릎을 꿇었다.
“아들아... 도대체 얼마야.
얼마인지 알아야 돈을 빌려오지...”
동생은 울면서 말했다.
“내가 이러니까 계속 돈을 빌리잖아... 어떻게 말을 해...”
동생의 우는 표정, 말투가 다 연기처럼 보였다.
나는 산소가 부족해서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쓰러지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아빠가 울고 있었다.
내 기억 속에서 아빠가 운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그날, 아빠는 나를 꼭 안고 울었다.
“오늘은 할머니 옆에서 같이 자자.”
그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 아빠가
이제는 무릎을 꿇고 아들을 붙잡고 울고 있다.
엄마는 그저 이런 상황을 소파에 앉아
바라보고만 있었다.
도대체 엄마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나는 눈물이 날 것 같다가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다 미쳐 있었다.
그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모두가 미쳐 있었다.
<사랑받기 위해서였던 나날>, 昀[햇빛 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