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배우는 사랑!
27화 창조의 잉태
-다시 배우는 사랑-
등장인물: 루미나, 소피아
달팽이 버스 안.
잠든 루미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소피아는 그녀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래도록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비밀 이야기처럼...
“난 결혼 전, 음악가였어요. 대학에 들어가면서 원대한 꿈을 품었죠. 그렇게 유학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과 우연한 사랑에 빠졌어요. 하지만 실수였어요.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젊고 어린 날의 실수...”
루미나는 잠결에 들려오는 소피아의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으며, 마치 꿈속에서 대답하듯 조용히 속삭였다.
“순간에 충실하셨겠죠. 결혼은 실수였을지 몰라도 아이는...”
소피아는 잠시 침묵하다 감정을 눌러 담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뇨. 실수였어요. 테오를 갖고 난 뒤, 깊은 우울감과 상실감에 빠졌거든요. 사업가였던 남편은 하룻밤의 실수를 외면하려 했죠.”
“멍청한 사람이었네요...”
“그래요. 멍청한 남자였어요. 테오가 태어난 후, 그는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고, 성실한 남편이 되려고도 했지만, 난 이미 마음속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어요. 간절한 그 꿈이, 그 사람과 아이 때문에 산산조각이 났다는 생각에 극심한 산후우울증에 시달렸죠.”
“흠...”
“테오에게 난 좋은 엄마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더 솔직하자면, 테오를 볼 때마다 남편 얼굴이 자꾸 떠올라요. 그 복잡한 감정 때문에 아이에게 온전히 다가서지 못했던 순간들도 많았죠.”
"아, 그러니까요. 사람들 앞에서는 친절한 모습이었지만, 아이와 단둘이 있을 때는 그 불안한 감정들이 테오를 향해..."
“네? 그게 무슨.”
“네?! 잠결에 그만, 제가 방금 뭐라고 했죠? 소피아?”
“저... 아, 아니에요.”
비몽사몽 한 루미나의 말에 소피아가 잠시 당황한 듯했다.
당황한 그녀의 모습을 본 루미나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그녀는 창가 쪽으로 몸을 완전히 숙인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달팽이 버스가 한참을 달리는 동안, 소피아는 루미나에게 자신의 말을 꺼낼까 말까 망설이길 반복하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테오는 예쁜 아이였어요. 내가 외로워할 때면 항상 곁에 있어줬죠. 남편보다 그 작은 아이가 더 큰 위안이 됐어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예요. 어느 날, 남편은 내가 산후우울증이 심각하다고 생각했는지 한국에 있는 큰 병원에 가보라고 권했어요. 저도 그러겠다고 했죠. 하지만... 그 사람은 나와 테오를 떼어놓으려 했어요. 자신이 혼자서도 잘 돌볼 수 있다고 하면서요.”
말없이 듣고 있던 루미나를 한 번 쓱 바라본 소피아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 말에 화가 났어요. 날 미친 사람 취급하니까... 난 테오가 없으면 불안하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도망쳤나 보네. 그 작은 아이가... 섬세한 아이를 그렇게 거칠게 다뤘으니!”
루미나는 터져 나오는 말을 두 손으로 꾹 눌러 담으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소피아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피아는 길가에 잠시 차를 세우더니 그녀를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루미나...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영매라고는 하던데... 여기 지금 뭔가가 있는 거예요?”
소피아는 온몸이 으스스해지는 오싹함에 혼란스러운 눈으로 허공을 훑었다.
“아니에요! 그냥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에요. 잠결에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 비몽사몽 한 상태라, 입이 주체를 못 하고 그만...”
“그렇죠? 깜짝이야. 난 또 날 혼내려는 신이 들어온 줄 알았어요. 그럼, 안심하고 다시 출발할게요. 엇?! 잠시만요. 그 말은... 방금 한 말이 전부 루미나 생각이었다는 거예요?”
“아뇨. 저는 그런 말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소피아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있었고요.”
“흠. 루미나, T예요?”
“아뇨, MBTI는 신뢰할 만한 게 아니라서요. 사람을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으면, 애초에 새로운 종족들이 생겨났겠죠.”
“T… 확실해요.”
“전 그런 걸로 불리고 싶지 않아요. 소피아는 그럼 F종족이에요?”
“INTP!! 이게 루미나예요.”
“마음대로 하세요.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소피아는 다시 운전대를 잡고 달팽이 버스를 출발시켰다. 달팽이 버스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여전히 꿈의 숲 속을 달리고 있었다.
“루미나, 나는 뭐 같아요?”
“F종족?”
“아하하. 농담 말고. 진짜 딱 봐서 뭐 같아요?”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 보니까... E... I?... F 아, 그런데 이런 게 소피아는 재미있어요?”
“뭐, 재미있어서 하나요? 사람들은 겉으로만 보면 속을 알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표현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난.”
“그럴 수도 있겠죠. 소피아가 좋으면 마음대로 해요. 난 그냥 듣고만 있을 테니.”
소피아는 그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그녀 앞에서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몇 년 전에는... 또 이런 일도 있었어요. 우습죠? 호호.”
루미나는 점차 그녀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더니, 곧 모든 감각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또다시 고요한 침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루미나의 꿈—
소피아의 배가 커다랗게 불러 있었고, 그녀는 환한 미소를 띠며 루미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예요?”
“아기예요.”
“무슨 아기요? 갑자기 아이를 어디서...”
“만져 볼래요?”
소피아는 루미나의 손을 잡아끌며, 자신의 배 위에 얹어 놓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배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루미나의 손길이 닿자, 뱃속의 아이가 천천히 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두 팔을 쫙 펴며 그녀의 배를 밀어냈고, 소피아의 배 위로 작은 손바닥의 윤곽이 또렷이 드러났다.
루미나는 그 손이 금방이라도 피부를 뚫고 나올 것만 같은 느낌에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앗!”
놀란 루미나는 소피아의 배에서 얼른 손을 떼고, 멀뚱히 아이의 태동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냈고, 살아 있는 생명체임을 루미나의 꿈을 통해 선명히 각인시켰다.
‘우주, 자연과의 연결감, 그리고 엄마와 아이의 연결감. 창조란 결국 이것과 다르지 않다. 생명을 창조하는 자들, 그 무게... 꿈의 설계자... 생명과 삶, 그리고 피조물과 창조자들...’
루미나는 꿈속에서 그 말을 나지막이 읊조리다 잠에서 깨어났다.
“뭐라고요?”
“아니에요. 잠결에 그만...”
“그나저나 제 신발 못 보셨어요?”
“신발? 아, 아까부터 쭉 맨발이었잖아요.”
“이런, 언제 벗겨진 거야...”
“잠깐만 기다려요.”
그녀는 자신의 신발을 벗어, 루미나 쪽으로 슬며시 밀어 넣었다.
루미나는 소피아의 신발을 힐끗 바라보다, 창문이 없는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숲 속 나비들의 사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신발을 주면, 소피아는 뭘 신고 다니려고요?”
“루미나가 날 도우러 온 거잖아요. 그러다 그 모진 일을 겪었는데, 이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미안하잖아요.”
“테오도 찾지 못했고, 샘의 물건을 찾으려다 다친 거예요. 그게 왜 소피아 때문이에요...?”
루미나는 소피아가 밀어 놓은 분홍 운동화를 다시 그녀의 발 밑으로 밀어냈다.
“그래도 루미나가 신어요. 루미나는 나보다 운동신경이 좋아 보이고, 우리 테오를 만나면 얼른 달려가서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요. 우리 테오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자기 아빠 닮아서 날쌘 편이에요. 아마 그때처럼 달아나 버리면, 나는 테오를 따라잡기 힘들어요. 그러니 부탁해요.”
그녀의 말을 들은 루미나는 조심스럽게 소피아의 신발에 발을 넣어 보았다. 놀랍게도 신발은 그녀의 발에 꼭 맞았다. 발가락 하나하나가 신발 안으로 편안하게 자리 잡았고, 마치 자신의 신발처럼 익숙했다.
“그럼, 테오를 찾는 동안만이라도 소피아의 신발을 신고 있을게요. 그리고 꿈의 숲에서 신발을 발견하게 되면 돌려드릴게요.”
“그냥 계속 신어요. 찝찝해서 그런 게 아니라면, 그냥 신고 있어요.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니까.”
“그럼, 테오를 찾을 동안만이라도...”
둘은 봄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길을 오래도록 함께 달렸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흩날렸고, 산수유와 개나리가 만들어낸 밝은 색채는 그들의 의식마저 환히 밝혀주었다. 간혹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코끝에 닿는 라일락 향기가 더해진 그곳은 마치 천국의 일 부분 같았다.
시간이 흐르자, 소피아는 따뜻한 햇살과 반복되는 숲의 풍경 속에서 지루한 듯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녀는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견디지 못한 채 휘청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루미나는 조용히 운전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제 제가 운전할게요. 소피아는 이제 좀 쉬어요.”
“그래 줄 수 있어요? 너무 미안해요. 온몸이 갑자기 나른해져서...”
소피아는 미안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비볐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이런 달팽이 버스는 졸릴 만도 하죠.”
“그래도 너무 귀엽지 않아요? 느리니까 더 귀여워... 하~암.”
소피아는 이야기 도중 길게 하품을 한 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루미나에게 운전석을 양보했다.
곧 루미나는 달팽이 버스를 출발시켰고, 소피아는 봄바람을 통해 실려오던 꽃내음에 취해 다시 한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루미나는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마음으로 고요한 꿈의 숲길을 천천히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