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켜버린 기억!
26화 거꾸로 흐르는 도시
-엉켜버린 기억-
등장인물: 루미나, 소피아, 테오
달팽이 버스가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루미나와 소피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작은 버스 안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채웠다.
“이 달팽이 버스는 애매한 속도라서 더 재미있어요.”
"이 정도면 충분하죠! 사고 날까 조마조마할 필요도 없고, 걸어가는 것보단 백 배는 낫고요."
"그러게요. 이런 버스는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요?"
"외관은 나무로 만든 것 같아요. 혹시 조각가나 조각을 하는 엔지니어가 아닐까요?"
루미나는 창문 없는 달팽이 버스의 외관을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정말 누군가를 위해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마치 루미나가 신전의 온천수를 개방했던 것처럼요.”
"개방이라고까지는... 그저 청소하고 물길만 터준 건데요. 뭘. "
"누가 남을 위해 그렇게까지 청소하고 가꿔요. 루미나 씨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에요."
"특별하다는 말이 꼭 봉사를 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리네요. 하하."
"그런 게 아니라,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하다는 거예요."
달팽이 버스는 느리지만 걷는 것보다는 빠르게 그들을 다음 세상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너무 느릿하게 달린 탓에, 소피아는 루미나의 옆자리에 기대어 이내 잠에 들고 말았다.
그때였다. 숲길을 휙 스치는 노란 머리 아이가 루미나의 눈에 띄었다. 다급해진 루미나는 잠든 소피아를 깨우지 못하고 그대로 숲 속으로 달려갔다.
성인이 지나기 힘들 만큼 좁고 작은 오솔길로 접어든 그녀는 아이가 지나간 그 길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수풀과 장미의 가시가 그녀의 옷가지에 달라붙어 성가시게 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찾아 나섰다.
꿈의 숲 속 또 다른 마을에 도착한 루미나 앞에, 모든 사물과 지형이 얽히고설켜 마치 억지로 뒤섞인 듯한 세상이 펼쳐졌다. 꿈의 숲에 정착한 사람들로 보이는 여행자들은 거꾸로 된 도로와 트레일 위를 달리는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그곳은 매연으로 가득했다.
매캐한 냄새가 루미나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자연의 일부인 그녀에게, 이 마을은 철근과 기계 부품으로만 이루어진 낯선 세계였다. 비탈진 철골 위를 오르내리는 열차를 보며, 루미나는 온 세상이 뒤엉킨 듯한 풍경에 멀미를 느꼈다.
'이런 곳에 더 있다가는 정말 병이 날 거야. 아이부터 찾아야 해.'
뒤엉킨 세상의 풍경 속에서 열차들은 하늘을 가로질러 달리고, 자동차들은 거꾸로 된 도로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일상처럼 언덕을 거꾸로 오르내리며 곡예를 부리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루미나에게는 기이하고 낯설었다.
루미나는 하늘의 트레일이 이어지는 승강장으로 들어섰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열차에서 내려, 차례로 원통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대체 저게 뭐야? 원통으로 들어가는 이유가 뭐지?'
루미나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 원통 속으로 들어갔다. 그 통로는 이용자가 원하는 승강장으로 빠르게 이동시켜 주는 장치였다. 투명한 재질로 된 그 통로는 햇빛이 그대로 스며들 만큼 빛을 잘 통과시켰다.
통로를 거쳐 승강장에 도착한 루미나는 투명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곳에는 돌길을 따라 풍성하고 다양한 코스모스가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몇 걸음을 더 내딛자, 커다란 은행나무 옆으로 웅장한 자연의 놀이공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로 존재했어. 놀이공원이...'
루미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놀이기구들에 시선을 빼앗긴 채 그대로 멈춰 섰다. 그녀는 회전목마를 다섯 번이나 돌려 타며,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신난 발걸음으로 열기구 쪽으로 달려간 그녀는 잠시 머물다 그 위에 올랐고, 나무와 자연으로 이루어진 놀이공원 곳곳을 뛰어다니며 마음껏 즐겼다.
그러다 놀이공원 한쪽 끝에 세워진 작은 소극장을 발견했다. 무대 위에는 가방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루미나는 가방으로 다가가 살폈고, 그 뒤편에 적힌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가방 속에는 부엉이 형상의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카메라 하나가 들어 있었다.
‘샘... 샘...?’
샘의 가방을 손에 쥐고 있는 루미나 곁으로 꿈의 숲 여행자로 보이는 남성 두 명이 걸어와 말을 건넸다.
“그 카메라 당신 거예요? 그런 물건은 이곳에서 엄청 귀하다고 들었는데...”
“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 친구 샘의 물건이에요. 여기 보세요, 이름이 적혀 있잖아요.”
“이, 샘이라는 사람이 그 샘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진짜 그쪽 친구 거라는 확신 있어요?”
“...”
“대답 못 하겠죠? 세상에 샘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우리도 같이 발견한 거니까... 소유권은 좀 정해봐야겠네요.”
“이 카메라가 당신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잖아요.”
“꿈의 숲에서 사진을 찍고 싶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요? 그 사진들을 세상 밖으로 가져가 팔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을 바꿀 만큼 큰돈을 벌게 될지도 몰라요.”
일행으로 보이는 그들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오자, 루미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카메라 작동법을 아세요?"
루미나는 카메라 아래쪽 뚜껑을 열어 배터리와 메모리 카드를 전부 빼낸 뒤, 태연한 얼굴로 그들에게 텅 빈 카메라를 건넸다.
"자, 여기요."
그들은 카메라를 받아 들고는 작동을 시도했다. 하지만 곧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켜는 법 아는데... 어? 왜 안 켜지지? 고장 났나 본데요?"
그들은 당황한 듯 카메라를 이리저리 살피며, 툭툭 두드리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도 처음 봤을 땐 고장 난 줄 알았어요. 그래서 버려야 하나, 그냥 가지고 갈까 고민했죠. 버리려던 순간, 문득 샘이 들려줬던 ‘꿈’ 이야기가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죠. 이 카메라를 샘에게 돌려주면... 혹시 마법처럼 다시 작동해서, 잃어버렸던 그 꿈을 찾게 되지 않을까 하고요.”
“오, 그거 일리 있어요! 저희도 꿈의 숲이 꿈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관련된 물건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거든요.”
“네! 맞아요. 그럼 꿈의 구슬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요?”
“꿈의 구슬?!”
"네, 꿈의 숲에서 진정한 꿈을 찾고 확신하게 되면, '꿈의 구슬'을 얻게 된대요. 숲을 떠날 때는 반드시 그 구슬을 지니고 나가야 하고, 외부 세계에서도 절대로 잃어버려선 안 된다고 들었어요."
"와, 꿈의 숲 박사님이시네요! 반가워요. 저희도 꽤 오래 여행했는데 아직 꿈을 찾은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어요. 좋은 정보 정말 고마워요."
"그럼 저는 이만... 저쪽으로 사라져 볼게요."
루미나는 부엉이 카메라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하하, 굳이 사라질 것까지야. 네네, 잘 가요!"
루미나는 그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는, 재빨리 놀이공원 뒤편 길로 빠져나왔다.
가장 높은 지점의 뒷길에 서니, 놀이공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루미나는 아쉬운 마음에 발길을 멈췄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카메라에 배터리와 메모리 카드를 다시 꽂아 넣고, 아름다운 놀이공원의 풍경을 향해 연달아 셔터를 눌렀다.
‘샘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 신비로운 이곳의 이야기를...’
루미나는 한국의 조선 시대에서나 볼 법한, 크고 붉게 칠해진 뒷문을 천천히 열고 밖으로 나섰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자마자 맑았던 꿈의 숲 공기와는 달리 매캐한 매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회색빛 먼지로 뒤덮여, 숲의 생명력이 사라진 차가운 도시였다.
빵빵—
온갖 소음들과 매 쾌한 공기가 그녀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놀이공원에는 아이가 없었어. 노란 머리라면, 눈에 잘 띄었을 텐데 말이야.’
놀이공원을 빠져나온 루미나가 들어선 길은 벌집 모양의 둥근 아치형 도로였다. 보행 공간은 거의 없었고, 모든 자동차가 트레일을 거꾸로 오르듯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루미나는 발 디딜 틈조차 없는 도로에 갇힌 듯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그때 어디선가 경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토바이 한 대가 그녀의 바로 옆을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 뒤이어 트레일을 거꾸로 달려온 자동차 한 대가 정면에서 루미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발 디딜 곳이 엇…!'
루미나는 당황해 엉킨 도로 위에서 발을 헛디뎠다. 곧 그녀의 몸이 기울며 70도 경사의 난간에 올라섰고, 가까스로 균형을 잡으며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이 정도야 뭐, 꿈의 숲에서 견뎌온 나에게는 어렵지 않지.’
하지만 거꾸로 흐르던 도시의 구조는 수많은 기하학적 도로들이 복잡하게 얽힌 형태였고, 루미나가 커다란 원형 베어링을 밟는 순간, 그것은 마치 도시의 몸체에서 떨어져 나온 부품처럼 삐걱이며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중심을 잃은 채 베어링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곧 언덕길을 따라 정신없이 구르기 시작했다.
‘어랏! 이게 아닌데...’
베어링 속에 갇힌 채 함께 구르던 루미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다행히도 베어링은 겉은 회전하되 안은 고정된 구조여서, 루미나가 크게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다.
그녀가 도시의 부품과 함께 굴러 떨어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소리치기 시작했다.
“어머! 저 사람 좀 봐요! 굴러 떨어지고 있어!”
“저길 맨몸으로 왜 올라갔대!”
“꺄악!”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대한 베어링이 언덕길을 빠르게 굴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루미나는 그 혼란 속에서도, 잃고 싶지 않은 꿈의 일부인 것처럼 카메라를 품에 꼭 안았다.
‘샘의 세계를 망가뜨릴 수는 없어!’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루미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없었다. 베어링이 지면에 닿자 긴장이 풀린 그녀는, 빙글빙글 도는 베어링을 멍하니 보다가 의식을 잃었다.
루미나는 심연의 꿈속으로 침잠했다.
그곳에는 미래 도시와 닮아있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열차들과, 그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루미나가 정신을 차리자, 소피아의 모습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하얀 손수건으로 루미나의 얼굴에 쏟아지는 햇빛을 가려주었다.
다행히도 루미나는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튄 파편에 긁혀 피부 곳곳에 작은 상처들이 붉게 번져 있었다.
“아, 아파....”
소피아는 상처 입은 루미나를 바라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예요! 어딜 갔었어요!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요? 신발은 또 어쩌고, 맨발로... 다 상처 투성이잖아요. 다리는 또 왜 이래요? "
난간에 긁힌 루미나의 한쪽 다리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안 되겠어요. 다시 신전으로 가요. 그곳에 몸을 담그면 치유가 될 거예요. "
"그럴 시간 없어요. 그 손수건 좀 빌릴게요."
루미나는 소피아의 하얀 손수건을 건네받아, 다친 다리의 피를 쓱 닦아냈다.
"꿰맬 정도로 다친 건 아니에요. 그냥 다 스친 상처들 뿐이에요. "
"그래도 속상해요. 자기 몸을 이렇게 함부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 어요! "
"샘의 기억을 찾아줄 생각 하니까 너무 기뻤나 봐요. "
“아무리 그래도! 다치지 말란 말이에요! 지금 중요한 건 루미나, 당신 자신이에요! 여기 왜 온 건지는 기억하죠? 꿈을 찾으러 온 거잖아요!”
“목적이 생기긴 했죠. 하... 그런데 잊었어요. 꿈의 숲이 너무 다이내믹해서. 하하하.”
"웃음이 나와요? 그렇게 다쳐놓고선..."
루미나는 샘의 가방을 꼭 끌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
루미나를 일으켜 세운 소피아는 그녀를 부축해 달팽이 버스가 있는 곳까지 걸었다.
“꿈의 숲에서 이렇게 상처 입은 사람은 루미나 당신뿐일 거예요. 이곳은 상처입지도 죽지도 않는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이것 봐요! 무모했어요! 무슨 일을 겪은 거예요. 대체.”
'상처입을 수 없다고?... 그럴 리가…'
루미나는 양손으로 꼭 잡은 샘의 카메라를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그래도 찾았잖아요. 샘의 꿈.”
소피아는 루미나에게 샘이 누구인지 물었다. 루미나는 달팽이 버스까지 걸어가며 샘과의 추억을 이야기해 주었고, 소피아는 그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루미나를 꼭 안아주며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누군가의 꿈을 찾아주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재능이자, 루미나만의 능력일지 모르지만, 난 루미나가 행복하길 바라요. 자신의 행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알았어요. 다시 그러라고 해도, 이렇게 혼쭐이 났는데 남의 일에 함부로 나서겠어요? 하하. 근데 정말 따끔거리네요. 으...”
"정말 못 말려요. 좋은 사람이란 건 알았지만, 너무 곧은 사람인 것도 문제네요. 루미나. 자신을 잃으면, 모든 것이 흩어져요."
“자신을 잃으면 흩어진다... 그 말 명심할게요.”
루미나는 온몸에 난 상처들을 매만지며, 버스로 올라탔다.
소피아가 다친 루미나를 위해 달팽이 버스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루미나는 욱신거리는 몸을 의자에 묻고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