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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저녁의 시

오늘의 시낭송

by 김승하


https://youtube.com/shorts/gabk-QhXQ8Q?si=fLvDCLpY9X15NY1_

가을저녁의시5.png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나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시: 민음사,김춘수시선,[처용]에서


오늘의 시낭송

-김춘수 시인의 「가을 저녁의 시」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김춘수 시인의 대표작 「꽃」과는 또 다른 성격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김춘수 시인은 초기에는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를 썼지만, 후기로 갈수록 죽음과 소멸, 초월과 덧없음, 그리고 정적이고 비극적인 세계 인식이 중심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소개하는 「가을 저녁의 시」는 그의 후기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누가 죽어가나 보다”라는 반복은 특정한 존재가 아닌, 존재 일반에 대한 허무와 애도를 담고 있으며,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라는 표현은 생명의 고귀함을 노래하면서도 그 끝을 물 같이 흘러가듯 조용히 묘사합니다.

제가 20대,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 김춘수 시집 『처용』에 수록된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대표작 「꽃」보다 오히려 이 시에 더 깊이 끌렸던 기억이 납니다. 이 시는 죽음과 이별의 감각이 반복되며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 냅니다. “누가 죽어가나 보다”라는 구절은 확신보다는,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는 마음. 혹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정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 슬픔은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기에, 오히려 더 큰 여운을 독자에게 남깁니다.

“살을 저미는 세상 외롬”, “물 같이 흘러간 나날”—이러한 표현들은 회한과 무상함을 보여주며,

특히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아온 존재의 죽음”은 사랑의 일생이 끝나는 순간을 절절하게 드러냅니다.

가을은 흔히 인생의 말기, 이별, 고요한 죽음을 상징하지만, “슬픈 눈을 보아라.”—라고 표현한 이 구절은 마치 자연이 눈을 뜨고 슬픔을 바라보는 존재처럼 느껴지게 하며, 감정을 확장시킵니다. 자연 전체가 풀과 나무, 산과 언덕, 가을까지도 죽음을 함께 애도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반복과 점층의 장치를 통해 처음엔 막연했던 감정이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온 존재”로 구체화하고, 울부짖음이나 고함 없이, 반만 뜬 눈, 저녁의 정경, 슬픈 가을의 눈 같은 이미지들이 독자의 감정을 조용히 끌어올립니다.

“차마 다감을 수 없는 눈”,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 이와 같은 표현은 일상의 언어를 벗어나 시적 언어로 승화된 절제의 문장입니다.

시인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바라보는 이 시선은 더욱 보편적인 애도를 가능케 하며, 사랑, 외로움, 존재의 무상함이 고요히 겹쳐지는 순간을 담아냅니다.

마지막 구절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라는 이 구절은 눈물처럼 흐르는 삶의 마지막 장면을 마주하며, 그 누구든 언젠가는 맞이할 이별을 조용히 바라보는 시선으로 승화시킨 아름다운 시적 결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2025.11.14. 김승하/kimseon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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