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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살펴볼까 뽑아낼까

민낯

최근 서점에 들러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를 집어 드니, 바로 옆에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가 눈에 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고 바로 소유냐 존재냐를 읽는다.

영어 제목 ‘To Have or to Be’을 읽으니, 햄릿의 명대사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이 떠오른다. 중딩 시절까지는 Be 동사를 ‘~이다’ 정도로만 생각하다가, 고딩이 되어 ‘human being’이라는 단어를 만나니, 너무 생경했다. 왜 being을 쓰지? 지금은 넌지시 ‘인간 존재’나 ‘존재하는 인간’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텐데, 그때는 왜 그렇게 어렵게 느꼈는지? Be 동사는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면서도 미묘한 존재론적 개념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프롬은 시를 통해서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을 설명한다. 테니슨의 시를 소유양식의 예시로 든다. “갈라진 벼랑에 핀 한 송이 꽃,/나는 너를 틈 사이에 뽑아 따낸다./나는 너를 이처럼 뿌리째 내 손에 들고 있다.” 반면에 존재양식의 예시로는 바쇼의 시를 든다. “가만히 살펴보니/냉이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울타리 옆에!”

테니슨은 꽃을 경이로움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지적인 호기심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 같고, 바쇼는 꽃을 가만히 바라보며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나에게는 소유양식은 원초적인 것으로 다가오고 존재양식은 관조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에서 소유양식에 관한 것과 존재양식에 관한 것을 찾아본다. 김필의 노래 ‘다시 사랑한다면’에서 “이젠 알아요 영원할 줄 알았던/그대와의 사랑마저 날 속였다는 게/그보다 슬픈 건 나 없이 그대가/행복하게 지낼 먼 훗날의 모습”의 대목이 테니슨의 시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화자는 떠나버린 연인을 지금도 소유하고 싶어 하며, 화자 없이 떠난 연인이 ‘행복하게 지낼 먼 훗날의 모습’이 슬프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번에는 악뮤의 노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에서 “일부러 몇 발자국 물러나/내가 없이 혼자 걷는 널 바라본다/옆자리 허전한 너의 풍경/흑백 거리 가운데 넌 뒤돌아본다”의 대목이 바쇼의 시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화자는 혼자 걷고 있다가 뒤돌아보는 연인을 바라보면서 ‘흑백 거리 가운데 너’라고 말하고 있다. 분명히 거리에는 흑백이 아닌 컬러가 존재하지만, 화자의 눈에는 자신의 연인 모습만 가득 차 있고, 나머지는 그냥 흐릿한 흑백일 뿐이다.


한편, 10여 년 전 즈음에 ‘애정남’이라는 개그 프로가 유행했다. 애정남은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를 말한다. 이 애정남은 마트 시식 코너에서 몇 개까지 공짜로 먹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3개’로 정해준다.

그 애정남 프로가 방영되고, 바로 5살 아들을 데리고 마트로 갔다. 일단 아들을 카트에 태우고 식품 섹터에 진입하니, 치즈 시식 프로모션이 한창이다. 평소 치즈를 좋아하던 아들은 순식간에 치즈 2 조각을 자신의 입속으로 밀어 넣고 양손에 각각 2 조각을 쥐고 있다. 아들의 볼은 이미 다람쥐가 되었고, 나에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의기양양하다. 전격적인 아들의 치즈 흡입 작전에 당황한 나는 애정남의 기준을 받아들여, 바로 그 치즈를 구매한다. 이런 게 소유양식인가?


프롬은 이번에는 대화를 이용해서 소유양식을 설명한다. “소유양식의 대화에서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이김으로써’ 자신의 자만심을 충족시키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자신을 내세우는 데 열중한다.”

나는 ‘이태원클라쓰’의 박새로이를 응원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장가 그룹의 회장이 전주 할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다. 전주 할머니가 회장에게 묻는다. “너는 장사를 왜 시작했냐?” 회장이 답한다. “식구들 밥 먹이려고 시작했습니다.” 전주 할머니가 다시 묻는다. “지금은 무엇이 목표냐?” 회장이 답한다. “지금은 박새로이 무릎 한번 꿇리고 싶습니다.”

프롬이 말하는 ‘상대방을 이김으로써’를 읽는 순간 장가 그룹 회장의 대사가 떠올랐다. 수험생 시절에 상대방을 이기려고 기를 쓰고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렇게 상대방을 이기고 나면 그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전혀 기억에 남지 않았고, 혹시라도 내가 졌다는 기분이 조금이라도 들면,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그 후로는 그 상대방은 나를 피해 다녔다.


계속해서 프롬은 소유와 존재를 대비하며 설명하지만,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살짝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대목을 만난다. “소유가 관계하는 것은 ‘물건’이며, 물건은 고정되어 있어 ‘기술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가 관계하는 것은 ‘경험’이며, 인간 경험은 원칙적으로 기술할 수 없다.”

대가들은 다 통하는 구석이 있나 보다. 이 대목에서 노자의 도덕경이 겹쳐진다. “도가도 비상도”,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상도(영원한 도)가 아니다. 도는 거울 같은 것이어서, 말을 통해서 고정적으로 표현하는 순간에 거기에 내포된 것이 휘발돼 버리지 않을까?


프롬은 경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사랑의 경험, 기쁨의 경험, 진리를 파악하는 경험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 여기에서는, 개인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전하고 있는 ‘장자의 윤편’이 읽힌다.

수레바퀴 기술자 ‘윤편’은 제나라 환공에게 자신의 경험을 아뢴다. “수레바퀴를 너무 작게 깎으면 바퀴집이 헐거워져 빨리 닳고, 반대로 너무 크게 깎으면 끼울 수조차 없습니다. 바퀴 집에 알맞게 깎는 기술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뿐이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공부하면서, 그전 단계와 가장 큰 격차를 느꼈던 것은 고딩 1학년 영어 독해 시험이었다. 중딩까지의 영어 독해 시험에서는 반드시 배웠던 내용에서만 출제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독해 시험이 아니고 암기력 시험이었던 셈이다.

그때는 한 학기에 2번 외부 영어 평가를 치렀는데, 50분 내에 6개 정도의 영어 독해 지문을 풀었었다. 그 당시에 처음으로 영어 독해 지문을 접하면, 일단 아는 단어가 몇 개 정도 있는지를 일별 했다. 그러고 나서 그 단어들을 연결하여, 나만의 스토리를 창작했다.

나중에 정답 해설집을 보고 나서야, 독해 스토리가 별개의 단편 소설이라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영어 독해 정답률은 매우 낮을 수밖에 없었고, 영어 시험은 고딩 3년 내내 매번 힘겨운 챌린지였다.


그러다가, 민법에 관한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민법 교과서를 읽기 시작했다. 민법 교과서의 내용은 분명히, 한자어가 많기는 하지만 평상시에 신문 지상에서 만날 수 있는 단어의 나열이었다.

그렇지만, 도무지 해석되지 않았다. 다시 고딩 1학년 영어 독해 시험의 악몽이 떠올랐다. 국어로 정리된 학문의 내용마저도 그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엄청나게 힘든 과정이었다.


친구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대화하다 보면, 분명히 동일한 단어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화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어릴 적에 시골에 살았고, 어머니는 막내인 나를 오일장이 있을 때마다 데리고 갔다. 그리고 큼지막한 알사탕을 사주셨다. 그래서 나에게 ‘시장’은 즐거운 추억이 묻어나는 곳이다.

반면에, 친구는 집이 가난하여, 초딩 시절에 ‘시장’에서 풀빵을 팔았다. 그 친구에게 ‘시장’은 어쩌면 숨겨야 될 치부일 수도 있어서, 가급적이면, ‘시장’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시장’이라는 단어는 동일하지만, 나랑 친구는 받아들이는 의미에서 큰 차이가 있다. 만일 어떤 경험의 내용이 복잡하고 길어지는 경우에는, ‘시장’과 같은 단어가 훨씬 더 많을 것이고, 그 차이가 훨씬 더 깊어질 것이다.

게다가, 경험의 내용을 분명하게 기술한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경험의 전에서 전제되는 것이 다르므로, 경험의 당사자에게는 당연한 것이 그것을 듣는 타인에게는 생략된 전제로 작용하여 그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장벽으로 작동한다.

한편, ‘경험은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라는 문구에 쏙 빠진다. 타인의 경험은 타인의 것이므로,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순간인 ‘지금 여기’를 온몸으로 느끼라고 프롬은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에 굴복하여 무한의 시간을 잡으려고 발버둥 치지만, 그것이 오히려 지금 여기를 온몸으로 느끼지 못하게 한다.


프롬은 인간의 삶에 방향과 의미를 제시하는 종교의 의미를 강조한다. 특히, “모든 사상을 버리고 집착을 갖지 않는 삶을 향해서 나간 부처”에 대해서 무한한 애정을 보인다.

어릴 때는 교회를 나갔다. 그러다가 의지가 생길 즈음부터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니 여러 친구들이 교회로 전도했지만, 결국 교회를 다시 다니지 않았다. 결혼하고는 불교 신도인 아내가 가끔씩 절에 갈 때마다 같이 갔지만, 법당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현재는 가장 관심이 있는 종교는 불교다.


10여 년 전에 유홍준 교수가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다. 평소 유홍준 교수의 책을 즐겨봐서, 유홍준 교수와 강호동 사이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둘 사이의 대화 중 하이라이트는 바로 강호동이 묻는다. “교수님, 이제까지 우리나라 산사는 몇 군데 정도 가보셨습니까?” “유홍준 교수가 답한다. 대략 2000 개 정도의 산사를 답사했습니다.”

강호동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묻는다. “그중에 딱 하나의 절만 찍어 주십시오.” 유홍준 교수가 머뭇거리며, 답한다. “우리나라에는 너무도 멋진 산사가 많아서 하나만 찍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강호동이 계속 보챈다. 결국, 유홍준 교수가 하나의 절을 찍는다. 바로 순천 선암사다.


순간 멍해졌다. 이미 30여 년 전에 선암사를 가봤다. 그리고 제일 열심히 읽었던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도 선암사에 대해서 여러 군데에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어, 선암사는 동네 뒷산 암자 같다. 그런 선암사를 최고의 산사 전문가가 최애의 절로 꼽다니.

무릎팍도사를 보자마자 바로 선암사를 가보고 싶었지만, 계속 버킷리스트에 넣어둔 채로 10년이 흐른 뒤에, 아내, 아들과 함께 겨울에 선암사를 방문했다. 30여 년 전에 보았던 선암사에 대한 추억은 사라지고, 유홍준 교수가 설명했던 것처럼, 선암사가 황홀하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서, 선암사 사진을 들여다보며, 생각해 본다. 분명히, 30여 년 전의 선암사나 최근에 본 선암사는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왜 다르게 보이지?


조그만 마을에 검소하지만, 이목구비 뚜렷하고 매력적인 소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조대로 꿋꿋이 잘 살고 있다. 다만, 다른 사람의 시선에는 신경 쓰지 않으니, 화장이나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고 민낯으로 지낸다.

최고의 성형외과 전문의가 이 마을을 우연히 지나다가 이 매력적인 소녀를 보았다. 그 후에 TV를 통해서 현재 우리 사회에서 최고의 미인은 그 매력적인 소녀라고 공표한다. 그 공표 전부터 이 매력적인 소녀에게 관심이 있던 동네 청년에게 이 매력적인 소녀는 그 전과 달리 보일까? 동일하게 보일까?


이번에는 프롬이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존재양식의 대표적인 종교로 불교를 꼽고 있다. 특히, “모든 사상을 버리고 집착을 갖지 않는 삶을 향해서 나간 부처”라고 극찬하며, 지극한 애정을 표현한다. 또 한 번 팔랑귀를 팔랑거리니, 불교가 다르게 다가온다. 결국, 유홍준 교수의 욕망을 욕망하듯, 프롬의 욕망도 욕망하고 있다.

프롬이 제시하는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그의 당부는 어렴풋이 이해된다. “우리가 자연 과학의 발달을 통한 ‘기술적 유토피아’의 건설을 위해 쏟아온 우리의 정력, 지성, 열의를 똑같이 ‘인간애가 지배하는 유토피아’의 실현을 위해 쏟는다면 실현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읽기:박찬국 지음/세창미디어/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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