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기부정과 사랑, 그리고 합일에 대하여

니시다, 기독교, 불교, 성리학의 만남

by 신아르케

니시다 기타로의 『선의 연구』를 읽으며, 특히 마음을 붙잡은 대목이 있다.
그는 도덕의 영역을 종교와 신의 차원으로까지 확장하며, 인간의 선이 궁극적으로 절대적 실재의 자각과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
나에게 이 통찰은 새롭고 강렬했다.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동아시아 사유의 언어가 서로 다르게 표현될 뿐, 결국 ‘내면의 변화’라는 동일한 지점을 향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기독교 전통은 구원에 관해 인간 능력의 한계를 분명히 말한다.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만 참된 구원이 가능하며, 인간은 스스로의 자아를 철저히 버려야 한다.
이것이 곧 자기부정, 즉 ‘자기를 죽이고 성령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은 은혜로 다시 태어나며,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쉽지 않다.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교 역시 자기를 버림으로써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무아(無我) 와 공(空) 의 가르침은 ‘신과의 합일’이라기보다, 모든 집착과 분별을 내려놓는 내적 해방의 길을 뜻한다.
자기를 비우고 욕망을 놓을 때, 존재는 비로소 연기(緣起) 의 진리를 깨닫는다.
그 안에서 ‘나’와 ‘타자’의 경계가 사라지고, 존재는 전체(신)의 일부로서 깨어난다.

니시다는 이러한 사유를 철학적으로 재구성한다.
그에게 ‘절대무(absolute nothingness)’ 는 세계 밖의 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有)와 무(無)의 대립을 넘어, 모든 존재가 스스로를 규정하며 드러나는 근원의 자리(場) 다.
이 자리에서 사랑은 “자기를 던져 타자와 하나가 되는 활동”으로 정의된다.
사랑은 곧 자기부정의 운동, 그리고 주체와 객체가 하나로 합일되는 경험이다.
여기서 ‘합일’은 타자를 흡수하거나 동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의 고유함을 온전히 인정하며 함께 존재하는 깊은 일치를 의미한다.

유교의 성리학에서도 이러한 사유는 낯설지 않다.
퇴계 이황은 ‘경(敬)’을 통해 마음을 단정히 세우고, 하늘의 이치(理)에 맞추려 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하늘과 하나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의 경지에 다가간다.
기독교가 은혜와 성령의 역사 속에서 변화를 말한다면,
유교는 자기 수양을 통해 도덕적 완성을 추구한다.
방법은 달라도,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고 타자와 조화를 이루는 삶이라는 목표는 닮아 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고 고백했다.
이것은 니시다가 말한 자기부정의 사랑과 같은 맥락이다.
니시다의 철학에서 신은 세상 밖에서 명령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비움으로써 인간 속에 내제하며, 현현하는 사랑의 근원이다.
이 사유는 기독교 신학과의 미묘한 차이를 남기지만, 거의 유사하다.
바로 그 긴장이 사유를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

성경의 말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20),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21)는
결국 합일의 영성, 사랑의 연합을 말한다.
이 구절들은 불교의 무아, 유교의 천인합일, 니시다의 절대무 사상과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모두가 자기부정과 사랑을 통해 인간이 근원적 선에 이르는 길을 노래하고 있다.

니시다는 신을 바다에, 인간의 영혼을 물결에 비유했다.
바다는 근원이며, 물결은 개별 존재다.
물결이 스스로를 고립시키면 바다와의 연결을 잃고, 결국 사라진다.
그러나 자신을 바다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물결은 근원과 함께 움직이며 의미를 얻는다.
우리 역시 그렇다. 자아를 절대화할수록 타자와 분리되고,
사랑과 구원에서 멀어진다.
자기를 비움으로써만, 우리는 전체의 생명에 다시 참여할 수 있다.

결국 나의 기도는 이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하나님, 제 영혼이 맑은 거울처럼 되어 빛이신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비추게 하소서.”
영혼을 닦고, 회개하며, 거룩함을 지키려는 노력,
그것이 곧 자기부정의 훈련, 그리고 사랑의 실천이다.
철학의 언어로 말하든, 신앙의 언어로 말하든,
결국 그 길은 하나로 이어진다.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니시다가 말한 선의 완성이며,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길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