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비판』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칸트의 사유를 관통하는 두 문장을 떠올린다.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에 있는 도덕법칙,
이 두 가지가 나의 마음을 늘 새롭고 깊은 경외로 채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고백.
“나는 믿음에 자리를 내어 주기 위해 지식을 제한해야 했다.”
이 두 문장은 그의 철학 전체를 꿰뚫는 정수이자, 사유의 원점이자 귀결이다.
칸트는 경건한 루터교 가정에서 태어나, 절제와 신앙의 삶을 부모에게서 배웠다.
그러나 이성이 급속히 확장되던 근대의 한복판에서, 그는 단순히 ‘계시의 종교’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철저한 이성의 사람으로서, 그는 신앙마저 이성의 빛 아래에서 성찰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신의 존재와 믿음에 대한 끝없는 번민이, 그의 철학을 움직이는 가장 깊은 동력이 되었다.
그는 기존의 형이상학, 즉 사변적 철학이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 초월의 영역까지 침범했다고 비판했다.
신의 존재, 영혼의 불멸, 그리고 세계 전체는 인간의 감각 경험을 초월한 초감각적 대상이기에, 인간의 이성으로는 그것들을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다.
설사 논리적으로 완전한 논증을 세운다 해도, 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이상 그것은 개념의 순환에 머물 뿐이다. 존재는 이성의 범위를 넘어선 영역이므로, 존재론적·우주론적·목적론적 신 존재 증명은 모두 이론적으로 입증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인간의 이성이 전체성·통일성·완전성을 향해 나아가려는 본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우리가 신과 영혼, 세계 전체의 개념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이성은 작동할 수 없다. 세상이 일정한 질서와 조화 속에서 작용한다는 전제가 없다면, 경험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의 개념은 증명할 수도 없고 폐기할 수도 없는, 이성의 규제적 이념으로 남는다. 칸트는 이 지점에서 ‘지식의 한정’이 곧 ‘믿음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로써 그는 인간의 순수이성을 경험의 영역으로 한정하며,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의 경계를 명확히 세웠다.
그 다음 그는 철학의 방향을 『실천이성비판』으로 돌린다.
그는 인간 내면에서 스스로를 명령하는 도덕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것은 감정이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곧 도덕법칙의 사실(Faktum der Vernunft) 이다.
그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넘어, 또 하나의 확실성을 발견한다.
“나는 도덕법칙을 의식한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도덕법칙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따를 자유 또한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도덕적 자유란 인과적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도덕 판단의 원인이 되는 능력이다.
이 자유가 없다면 인간에게 죄나 책임을 물을 근거 또한 사라진다.
칸트는 이러한 실천이성의 정점에서 최고선(Summum Bonum) 의 개념을 세운다.
이성의 목적은 도덕적 선을 실현하는 데 있으며, 내면의 도덕 명령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때 참된 행복이 주어진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는 정의롭지 않다. 도덕적 삶이 언제나 보상받지 않으며, 때로는 의로운 자가 고통받는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영혼의 불멸과 신의 존재를 실천이성의 정립(Postulate) 으로 상정한다.
도덕적 세계질서의 합목적성을 보증하기 위해, 신은 필연적으로 가정되어야 하며, 영혼은 불멸해야 한다.
결국 칸트에게 신은 이론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신은 도덕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의 대상, 곧 ‘이성의 신앙(Vernunftglaube)’이다.
그는 신을 안다고 말하지 않았고, 대신 실천 속에서 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가 말한 “지식을 제한하여 믿음에 자리를 내어 준다”는 뜻이다.
그의 철학은 신앙을 대신한 이성의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위한 이성의 겸손한 길 닦기였다.
철학자의 언어로 표현된 그의 고백은,
가장 아름답고 솔직한 신앙의 언어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