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편 - 6. 건축 설계 과정
"소장님! 작업하던 스케치업 파일 랜더링 중에 컴퓨터가 에러 났어요!"
저녁 10시쯤 '송당일경' 펜션 건축 설계 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디자이너가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디자이너가 작업 중인 성수동으로 달려갔다. 2주 동안을 공들여 작업해 놓은 건축 설계 스케치업 파일이 렌더링 중에 컴퓨터 과부하로 먹통이 되면서 날아간 것이다. 다행히 이전에 작업한 기본 레이 아웃과 일부 수정한 도면은 백업시켜 놓았지만 다시 전체적으로 수정작업을 거쳐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내일모레 건축주와 외관 디자인 및 평면 레이아웃 확정을 위해 미팅을 잡아놓았는데 어떡하지?'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디자이너가 이건 운명인 거 같다면서 4개월 전에 나와 함께 작업했던 애월 상귀리 농가주택 리모델링 평면을 오버랩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였다. 건축주 분과 그동안 미팅을 진행하면서 애월 농가주택 리모델링 평면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평면 레이아웃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이야기한 것이 생각난 것이다. 그래서 전체적인 사이즈를 조정하고 일부 수정작업을 거치면 되겠다 생각하여 곧바로 기존 평면에 오버랩으로 작업을 진행해 보았다. 이럴 수가! 우리가 당초 계획했던 "ㄱ"자형의 세로방향인 장방향 쪽으로 완벽하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렇게 전체 길이와 내부 일부 평면 수정, 창호 위치 변경 등의 작업을 거쳐 가장 이상적인 평면이 탄생하게 되었다. 단순한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필연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와 함께 작업하는 디자이너는 우리나라 유명 미대 출신으로 동 대학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였다. 이후 CF공간 디자이너로 활약하다가 최근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전향하여 활동하고 있다. 배달의 민족, 맥도널드 등 TV에 방영된 CF광고 대부분의 공간을 이 친구가 작업한 사실을 알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나와 같이 진행한 프로젝트는 홍대 BAR 상업공간과 세컨드하우스 리모델링, 제주 농가주택 리모델링 등의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건축적인 부분은 부족한 점이 있지만 컬러 매치와 공간 레이아웃, 그리고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뛰어난 여성 디자이너다. 대략 7년 전쯤 평창동 갤러리 모임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고 이후 서로 부족한 부분은 도움을 주고받으며 비즈니스 관계를 맺어왔다. 제주도 송당 프로젝트도 이 친구의 창의적인 능력이 필요해서 내가 먼저 제안하였다. 자신도 꼭 해보고 싶었던 프로젝트라며 건축주와의 두 번째 만남부터 지금까지 함께 작업해 왔던 것이다. 건축 설계 작업은 주로 저녁 시간에 함께 진행하였다. 작업을 하다 보면 새벽 2시가 넘어가는 일은 다반사였다. 늦어도 11월 20일까지는 제주도 인허가를 담당할 건축사 사무소에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했다. 또 건축사 사무소에 도면을 넘기기 전에 건축주의 최종 승인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밤늦게까지 작업을 진행했다. 건축주와 설계 + 시공 계약을 9월 말에 했으니 10월 초 추석연휴를 지나고 본격적으로 설계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11월 20일까지 설계를 완료하려면 고작 40일 정도의 시간밖에 없었다. 따라서 설계를 진행하는 동안 내가 옆에서 건축적인 요소들을 전부 확인하여 함께 진행하는 것이 수정작업을 최소화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렇게 2주 정도 거의 매일 새벽까지 디자이너와 작업을 진행하였고 최종 수정 작업을 거쳐 랜더링을 하는 순간 컴퓨터가 말썽을 부린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내가 생각했던 베스트 평면 레이아웃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말 그대로 전화위복이 되었던 것이다.
다음은 송당일경 건축 설계 중에서 건물 배치와 레이아웃에 중점 반영사항이다.
- 바다 조망을 향한 건물 배치
- 2개의 독립된 객실동(ㄱ자형으로 4인실 1개 동, 2인실 1개 동)
- 외부 도로에서 안뜰 마당에 대한 시선 차단(프라이버시 확보)
- 여행객들이 서로 동선이 겹치지 않게 이동통로 확보 및 출입구 위치 선정
- 보일러실 및 물탱크, 수공간 설비 시설 설치를 위한 별도의 창고 공간
- 건물 주변 산책로 및 내부 안뜰 정원면적 최대한 확보
- 2대의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
- 건물 뒤편의 돌담을 내부로 들일 수 있는 창호 설치
- 물이 흐르는 수공간과 툇마루 설치
"건축 설계를 하기 전에 건물이 지어질 땅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 님의 이야기이다. 앞에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혼자 현장 답사를 했을 때 어두컴컴한 저녁에도 방문해 보았고, 아침 새벽 동틀 녘에도 방문해 보았다. 무언가 땅이 전달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제주도 구좌읍 송당리 토지와 주변 풍경에 가장 잘 조화를 이루는 건축 디자인과 배치에 대해 영감을 받기 위해서였다.
한바탕 컴퓨터 소동이 있고 나서 약속한 다음날 건축주와 설계 확정을 위해 미팅을 가졌다. 물론 디자이너는 밤을 새워서 스케치업 도면 랜더링 작업을 완성하였다. 미팅 장소로 향하는데 아침부터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안양예술공원 김중업 박물관 안에 있는 '명당'이라는 카페에서 건축주 분과 만남을 가졌다. 이날은 자재 스펙을 제외하고 건축 인허가를 진행하기 위한 건물 배치와 평면 레이아웃에 대한 확정을 위한 만남이기 때문에 건축주와 아내분이 함께 카페를 방문하였다. 그동안의 건축 설계 진행 과정에 대한 자초지종을 설명드리고 향후 일정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드디어 카톡이 울리기 시작했다. 디자이너가 카톡으로 나에게 작업 결과물을 보낸 것이다. 미팅하는 내내 마음속으로 불안했다. '랜더링 도중에 또 컴퓨터가 먹통이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속이 타들어 갔던 것이다. 카톡이 왔다는 진동을 감지하는 순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노트북 화면으로 작업 결과물을 건축주 내외분에게 보여드렸다. 결과는 대만족. 두 분의 표정이 짐짓 놀라는 표정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결과물이 더 좋게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건축 설계에 대한 평면 레이아웃과 배치에 대한 것을 일사천리로 결정하였다. 사실 건축 설계가 한 번 만에 건축주 마음을 사로잡아 결정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몇 번은 보통이고 수십 번 수정작업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설계를 하는 건축사, 디자이너와 건물의 주인이 생각하는 것이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서로가 추구하고 원하는 바를 반영하여 모두가 만족하는 하나의 결과물이 나오기까지는 깊은 공감이 되었을 때 가능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처음 만날 때부터 건축주와 나는 깊은 공감을 나누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제주도로 내려가야 한다. 인허가를 담당할 건축사를 선정해야 하고 시공을 위한 준비 작업과 건축 공사 예상 견적서 산출등 할 일이 태산이다. 가장 먼저 현장에서 가까운 곳에 숙소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선발대로 제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