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에서 다른 장르로...
1991년 3월 철산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2학년까지는 하교 후 여전히 피아노 학원을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 갈 때는 버스를 타고, 올 때는 공원길을 가로질러 한참 걸어서 피아노 학원으로 갔다. 공부는 그럭저럭 따라갔기에 하교 후 피아노학원 가는 루틴도 계속할 수 있었다.
내가 다녔던 세 번째 학원은, 나래피아노 학원에서 목사님의 막내따님을 거쳐 우리 교회의 장로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긴 파마머리의 전공하신 선생님께 레슨을 받았다. 중1 때는 베토벤의 비창소나타를, 후반부터 쇼팽의 왈츠를 병행하면서 소위 클래식 작품을 하나둘씩 만나게 되었다. 확실히 테크닉면에서 쉽지 않았다. 어린 나는 한 작품을 깊이 들어가는 것보다 많은 작품을 해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타입이었다. 장로님께서 나를 매우 예뻐하셔서 피아니스트로 키우고 싶어 하셨지만, 중3이 되던 해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기로 결정했다.
부모님은 완강히 피아노를 전공이 아니라 취미로 하라고 하셨다. 나도 피아노가 좋기는 했지만 어려운 테크닉을 소화할 만큼 실력이 되는지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었다. 그럴 때 세상을 넓게 보고 피아노는 취미로 해도 괜찮다는 말은 내가 덥석 물기에 좋은 핑곗거리였다. 취미로 하기로 해 놓고도 한참을 찡찡거렸다.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했다는 부모님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중3 때 우리 반에 '샤론'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피아노로 예고 입시를 치른다는 얘길 들으니 아쉽고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친구가 예고에 합격하고 난 다음에 인문계 고등학교 입시가 치러졌는데, 난 성적이 많이 떨어져 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지원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너무 초라했다.
전공을 할까 말까를 결정할 때, 음악에 대한 나의 세계는 조금 다른 빛깔을 띠고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온통 클래식으로 꽉 찬 초록빛이었다. 중학교 입학 후 얼결에 학교 방송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일주일 중 하루를 맡아 점심시간에 교내에 음악을 틀었다. 초창기에 방송 내내 클래식을 틀자 여기저기서 항의(?)가 들어왔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가요와 팝송이라는 장르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015B'는 그때 처음 들은 그룹 이름이었다. '별밤'이라는 라디오도 즐겨 듣는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그동안 클래식만 듣느라 이용하지 않았던 카세트의 긴 은색 막대기를 쭉 빼서 이리저리 조절하며 주파수를 맞추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매일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이문세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오프닝 음악이 그전부터 귀에 익는 것으로 보아 집에 같이 살았던 이모와 삼촌들도 자주 별밤을 들었던 듯했다. 공부하면서 틀어놓고 있으면 외롭지 않고, 때론 위로도 되고, 재미있기도 해서 어느새 열혈 애청자가 되었다. 매일밤 10시부터 12시는 기본이고, 12시 이후에 '김현철의 음악앨범'까지 듣다가 잠들곤 했다.
'별밤'의 프로그램 중 '별밤 뽐내기 대회'라는 코너 덕에 김건모라는 가수에게 푹 빠지게 되었다. 당시 라디오에서 자신의 끼를 보여줄 수 있는 게 대부분 가요나 팝송을 부르거나 성대모사를 하는 것이다 보니, 즉흥적으로 시청자의 신청곡을 연주해야 하는데 김건모는 피아노로 그걸 해내고 있었다. '먼지가 되어'라는 곡의 전주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김건모의 피아노 연주에 매력을 느꼈다가 그의 목소리에 위로를 받으면서 그의 앨범을 구입하고, 새 앨범을 기다리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아 졌을 무렵 여중 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15세의 나의 음악 세계엔 클래식, 찬송가, 복음성가, 가요, 팝송 등이 들어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