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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학번입니다

무슨 과인지 관심 없는 새내기

by 엄살 Feb 05. 2025

"대학교 1학년은 프레쉬맨이니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봐."

프레쉬맨... 이란 단어를 언급한 사람은 아빠였다.


고3 때까지 "공부만이 인생이 전부다."라며 피아노전공은 절대 안 된다고 공부를 그다지 잘하지 못하는 첫째 딸을 학원이며 과외며 물심양면 지원했지만, 결과는 4년제 수도권 대학 지방 캠퍼스에 안착한 것으로 적당히 '타협' 혹은 '포기'하신 듯했다.


이로서 나는 18년 만에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학교에 VOH(Voice of Hanyang)라는 학내 방송국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입학하자마자 원서를 썼다. '아나운서부, 보도부, 제작부, 기술부' 4가지 부서를 놓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내가 가고 싶었던 과가 '신문방송학과'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나운서에 관심이 있었지만, 실제로 '방송국 앵커는 기자부터 시작이지 않나'라는 나만의 철학으로 보도부에 지원했다. 첫인상이 좋다는 무기를 최대한 활용해 면접까지 열심히 노력할 결과 방송국에 합격했다.


     




보도부는 스릴 넘치는 곳이었다. 보도부 선배들은 각자의 출중한 능력을 이용해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 보도부장은 하얀 얼굴에 은테 안경을 쓰고 지성미 넘치는 말투로 나의 기사들을 마구 갈궈댔다. 그의 동기인 보도부 남자 선배 1은 아나운서부에서 제일 귀염귀염한 언니랑 CC였는데 이상하게 여자들의 마음을 홀리는 구석이 있어 감정적으로 헷갈림을 많이 당했다. 남자 선배 2는 보도부장이나 선배 1에 비해 눈에 띄는 매력은 없는데 독특한 이름과 자신만의 안쓰러워 보이는 제스처로 동정심을 자극했다. 보도부장과 CC라는 여자선배는 큰 눈에 착한 인상으로 처음엔 같은 여자로서 의지하고 싶은 선배인 줄 알았으나 갈수록 멀어지는 요상스러운 관계가 되었다. 그나마 의지하려고 했던 남자 동기는 키에 바람둥이 같은 타입으로 속을 없었고, 여자 동기는 여름방학 이후 OB랑 눈이 맞아 사귀게 되면서 나와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보도부가 주로 하는 일은 '뉴스'를 취재하는 것이었다. 그 뉴스거리를 학내에서 찾아야 하니 매일같이 '총학생회'를 들락거리고, 집회를 쫓아다녔다. (1학년 때까지는 학교 앞에서 화염병 던지고 하는 집회가 존재했다)

학교가 경기도 안산의 외진 곳에 있다 보니 학교 앞 인도에서 동그랗게 둘러앉아 술을 마시는 '길카페' 문화가 자연스러웠다. 중간중간 위치한 잔디밭은 말할 것도 없었고 말이다. 낮이고 밤이고 여기저기서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는 것을 목격하며 나 역시 술 문화에 젖어들었다. 기자라고 하니 술을 한잔 더 마시면 기삿거리를 준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듣고 악으로 깡으로 술을 마시고 다녔다. 


학교생활은 점점 무너지고, 내가 가야 할 수업이 무엇이며 내가 무슨 과인지도 헷갈리는 지경이 되었다. 방송국의 남자동기들은 대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학고'는 한 번쯤 맞아봐야 되는 거 아니냐며 객기를 부렸다. 그 와중에 나도 정신줄을 놓고 1, 2 학년 내내 방송국에만 매달려 지냈다. 남은 건 후회와 공허함이었다. 


3학년을 앞두고 방송국을 그만두었고, 학교도 휴학했다.


(여기까지의 내용 중 오해가 없길 바란다. 모든 선택은 내가 했으며, 강요한 사람은 없었다. 당시 방송국 사람들 중 누구라도 언제라도 이 글을 본다면, 그저 꽤 오래전 일을 기억 속에서 편하게 끄집어냈을 뿐이므로 혹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한다) 






휴학하자마자 찾아간 곳은 교회였다. 대학에 들어가서 1-2년이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회를 떠나 살았던 시간이었다. 교회에서는 언제나 피아노 혹은 음악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다시 돌아간 그곳에서 나를 반겨준 것도 '피아노'였다. 1학년 때 프레쉬맨이 되기엔 자유로운 시간 외엔 여러모로 제약이 많았는데 특히 대학에 들어가던 해에 IMF가 터지면서 우리 집 역시 파산했던 것이 그중 하나였다. 휴학 생활을 유지하지 위해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했야 했다. 버스정류장 옆에 꽂혀있는 '벼룩 신문'을 들고 와 '피아노 개인레슨'을 찾았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이라고 하면 굳이 과를 묻지 않고 '음대생'이겠거니 믿어주는 분위기였다. 평일에는 여기저기 다니며 피아노를 가르치고, 주말에는 내내 교회에 있었다. 마치 지난 2년간 교회를 떠난 시간을 사죄하듯 충실히 신앙생활을 했다. 대예배 성가대 반주부터 어린이성가대 지휘, 찬양단의 건반주자. '쉼 없는 봉사'라는 곳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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