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스테이지
국민학교 1학년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광명시에 위치한 ‘동산교회‘. 어린 내가 기대거나 기어오르기에 충분했던 동산 같던 교회. 내게 교회는 놀이터였다. 집에서 언덕을 올라 상가들을 양쪽에 두고 쭉 걸어가다 보면 왼쪽에 보이는 자그마한 건물 반지하에 교회가 있었다. 서늘하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그곳의 기다란 벤치형 의자에 앉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꽃꽂이하는 엄마를 기다리다가 누워 잠들기도 했다.
매주 듣는 찬송가와 복음성가는 매일 먹는 밥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레 내게 스며들었다. 찬송가는 4 성부로 이루어져 있고, 복음성가는 코드라는 게 있다는 걸 모르면서도 들리는 대로 칠 수 있게 됐을 무렵, 교회 어린이 예배의 반주자가 되었다. 예배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까만 업라이트 피아노에 앉아 그날의 예배를 도왔다. 반주는 피아노를 내 마음대로 연주하는 게 아니라 성가대 혹은 싱어에 맞춰서 연주해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장점이 있었다.
동산교회는 어느 날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이사를 했다. 예배당은 훨씬 커졌고, 앞쪽 중앙에는 근사한 그랜드피아노가 생겼다. 교회 본당은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2층은 큰 배의 갑판처럼 중앙이 튀어나와 있어서 위에서 1층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일요일이면 어린이예배, 오후예배, 저녁예배 등 어른들이 드리는 예배까지 다 드리는 게 그날의 즐거움이었다. 때마침 독일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목사님의 막내따님이 귀국해 예배 반주를 맡았다.
당시 우리 교회의 성가대는 헨델의 메시아를 부를 정도로 실력이 대단했다. 난 매일같이 집에 와서 헨델의 메시아 전곡이 담긴 테이프를 찾아 듣고, 성가대인 엄마의 악보를 가져와 눈으로 훑었다. 테이프로는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메시아의 반주를 목사님의 막내따님은 피아노로 연주했는데, 큰 차이가 없을 만큼 꽉 찬 소리였다.
머든 들리면 들리는 대로 대충대충 치던 내 귀에 공교하고 예리하면서 살아있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막내따님의 대단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보통 전공자들은 코드로 된 소위 자유연주는 어려워하는데, 복음성가 반주를 할 때는 그것대로 맛깔나게 표현하는 능력이 있었다. '온 땅과 만민들아 주의 음성 듣고 모두 기뻐하라'라는 복음성가를 노래하듯이 표현하는 전주를 듣고 똑같이 치고 싶어서 집에 오자마자 피아노 앞에 앉기도 했다.
6학년이 되었고, 학교에서 합창단 반주자를 뽑았다. 나도 지원을 했는데, 키 크고 깐깐한 음악선생님께서 나를 뽑으셨다. 이유는 교회서 반주를 해서였다. '교회에서 반주를 하는 아이들이 실력도 좋고 성실하다나.' 솔직히 그분의 깐깐한 인상 때문에 좀 무섭긴 했지만 피아노 치는 것이 너무 좋고, 더구나 학교의 대표로 나가는 자리이니 잘해보고 싶었다.
매일 하교 후 한 시간씩 연습을 했다. 합창곡은 우리나라 전통 노래 한곡과 동요 한곡이었다. 매일 연습하다 보니 반주는 거의 외우다시피 했고, 합창단 반주를 맡으니 학교 내에서도 나름 유명해졌다. 피아노를 잘 친다는 이유로 나에게 호감을 갖는 합창단 내 친구들이 많았다. 걔들이 합창단 끝나고 집에 갈 때 떡볶이 먹으러 가자고 해서, 자주 떡볶이를 먹었다. 당시엔 500원만 되어도 떡볶이를 한 접시 먹을 수 있었는데, 어떤 날은 동전을 잔뜩 들고 와서 그날은 떡볶이,오뎅,튀김까지 다 먹을 수 있었다.
합창단 활동 덕에 졸업앨범 한편에는 학교 대표 합창단에 내 모습도 실렸다. 피아노를 치는 것이 자랑스럽고 뿌듯하다고 느꼈다. 아쉬운 졸업식을 마치고 며칠 뒤 여중에 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