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생들에게도 매우 인기였던 올림픽
1988년은 꽤나 인상적인 해였다.
내 생애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렸는데(1986년 아시안 게임도 있었지만 그땐 국민학교 2학년이라 기억나는 게 없다), 우리 동네를 지나가는 성화봉송주자를 응원하기 위해 전교생이 아침 일찍부터 깃발을 들고 주자가 지나가는 길에서 기다렸다가 박수를 치면서 깃발을 흔들었다. 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봉송주자가 들어올 때 뒤에 설치된 화면에서 영상이 나왔는데, 그때 스쳐가듯이 우리가 깃발을 흔드는 게 나와서 매우 신기했다.
나래 피아노 학원에 다닌 지도 2년이 되었다. 학원에서도 올림픽의 열기는 뜨거웠다. 평소 피아노를 열심히 치지 않는 6학년 오빠는 매일 학원에 와서 호동이 막대사탕을 빨면서 올림픽 경기 중계에 열을 올렸다. 그 전날 금메달을 따기라도 한 날이면 해당종목과 선수의 이름이 하루종일 원생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가장 기억에 남은 이름은 '칼루이스'. 단거리 달리기의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벤존슨'과의 대결에서 누가 우승하느냐로 의견이 분분하다가 벤존슨의 약물의혹이 제기되면서 칼루이스의 금메달이 확정되었던 순간은 나도 손에 땀을 쥐었다.
올림픽 기간 내내 학원은 떠들썩했고, 매일 학원에 갈 때마다 올림픽 소식을 주워듣는 게 일과가 되었을 무렵, 바흐 인벤션 4번을 치게 되었다. 처음 듣는 순간 속으로 '세상에 이런 곡이'라는 탄성을 질렀다. 그때까지 쳤던 대부분의 곡이 밝고 경쾌한 장조였는데, 이 곡은 단조이면서 무척 서정적이고 단정한 느낌이었다. 난 오른손이 먼저 연주를 시작하면 돌림노래처럼 왼손이 같은 선율을 연주하다가 금세 조화를 이루어 나누어지는 부분까지는 잘 연주하다가 오른손 트릴 3마디에서 1차 위기, 왼손트릴 5마디에서 2차 위기를 맞았다. 그전까지 트릴을 길게 연주한 적이 없었고, 더구나 왼손 트릴은 고르게 표현이 안되어 꽤 오랫동안 붙잡고 연습했다.
집에 와서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서서 이 곡을 연주하다가 앉아서 치라고 엄마한테 혼나기도 했다. (좋아하는 곡이 생기면 그 곡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아서 피아노에 앉을 새도 없이 손가락이 먼저 나가는 습관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트릴의 완성도 때문에 다음 곡으로 넘어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려 나중에는 다음곡으로 넘어가고 싶어 안달을 했었다.
그 해 가을에 피아노 콩쿠르대회가 있었다. 우리 학원에서는 나랑 한 학년 낮은 동생이랑 둘이서 출전했는데, 우리 둘 다 모차르트 소나티네를 연주했다. 처음 나가는 콩쿠르대회라 많이 긴장했다. 하필 그 전전날 무심결에 선풍기에 손을 살짝 넣었다가 놀래서 다음날 학원에 갔는데 마지막 리허설이 영 별로였다. 전날은 집 앞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면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중심을 잡다가 새끼손가락을 삐끗했다. 여러모로 최상의 컨디션은 물 건너가고 그냥 대회에 나가는 것으로 의의를 두자는 마음을 먹었다.
여름이 아직 남아있는 초가을의 일요일 오후, 선생님과 나와 학원 동생은 셋이서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콩쿠르대회장에 도착했다. 평소에 잘 입지 않는 윈피스에 스타킹을 신고 가서 어색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긴 드레스를 입은 내 또래의 아이들이 보였다. 대기석에 앉아 있다가 내 차례가 되어 심사위원 몇 명, 콩쿠르 참가자들과 부모님들이 드문드문 앉아있는 제법 큰 무대 위에 올라가서 연주를 시작했다. 내가 연주한 소나티네는 초반에 오른손으로 3성을 부드럽게 연주해야 하는데 거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해 그다음은 그야말로 대충 치다가 '그만'이란 소리에 멈추고 내려왔다. 그날 나랑 학원 동생 둘 다 상을 타고 트로피도 받았지만, 순위가 워낙 밑이었고 스스로 연주에 대한 자부심이 없어서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그날 세상에는 피아노 잘 치는 친구들이 많고 난 우리 학원에서나 잘 치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알았다.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자판기에서 선생님이 뽑아주신 켄터키 핫도그가 정말 맛있었다. 대회가 끝나고 긴장이 풀리니 배는 고프고 집에는 가야 하는데, 자판기에서 따뜻하게 데워져서 나온 핫도그는 그날의 내 마음을 위로하듯 입속으로 사르르 녹아들었다.
집에 돌아와 그날 다른 학생들이 쳤던 모차르트소나타와 베토벤소나타 등을 찾아보았고, 새로운 곡을 알게 되었다는 기쁨에 또 힘을 내어 열심히 건반을 두드렸다.
*오늘의 음악용어 해설
바흐의 '인벤션'은 바흐가 대위법을 가르치기 위해 작곡한 것으로 대위법이란 2개 이상의 선율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음악을 의미함. 매우 독창적이며 다성음악의 기초를 잘 보여줌.
'소나티네'(sonatine)란 작은 소나타라는 뜻을 가진 악곡이다. 보통 2-3악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10분 내외로 연주할 수 있다. 소나타에 비해 테크닉적으로 어렵지 않고, 분위기도 가볍고 밝은 편이라 초등학생들의 콩쿠르 곡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