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맑음
학창시절 이후 피부가 좋았던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아주 어릴 때는 피부가 좋았다. 백옥 같았다.
국민학교 시절만 해도 친구들이 피부가 뽀얗고 부드럽다며 만져봐도 되냐고 했던 기억도 난다.
옷 가게에서 옷을 입어도 아무 색깔이나 잘 받았다.
하얀 피부 덕분에.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여드름이 폭발했고 그걸 하나하나 다 손으로 짜고 뜯는 과정을 거치며
결국 얼룩덜럭 화산같은 피부가 되어버렸다.
돌이킬 수 없었다.
이십대가 되어 피부과에 몇 백을 갖다줘도 실패했고,
밀가루도 끊어보고 물도 많이 마셔봤지만 한번 망해버린 피부는 좋아지지 않았다.
사십대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공이 보이고 이제 처지기 시작해 주름까지 자글자글이다.
그런데 어떤 날,
유독 피부가 좋아보이는 날이 있다.
바로 푹 자고 일어난 다음 날.
모공이 사라진다거나 주름이 펴지지 않지만,
잠을 푹 자고 일어난 다음 날에는 피부가 왠지 맑아보인다.
그리고 잠을 푹 자려면 자려고 누웠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게 없어야 한다.
그래! 마음이 편해야 피부가 맑아진다.
그래서 어릴 때 피부가 백옥같았나보다.
공부 스트레스, 친구 스트레스가 생기면서부터 피부가 망했다. 확실하다.
그걸 깨닫고는 요즈음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 노력 중이다.
사소한 불쾌감은 그냥 넘긴다.
싫은 사람은 만들지 않는다. 모든 관계는 두 가지로 정의내린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관심 없는 사람.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룬다. 미뤄도 큰일 나지 않는다.
오늘 해도 되지만 내일 해도 되는 일은 무조건 내일로 미룬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다.
먹고 싶은 건 그냥 먹는다.
캬라멜이든 초콜렛이든 빵이든 면이든, 악착같이 관리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나이가 드니 살이 좀 붙은 게 훨씬 예뻐보인다.
나이 들어 마르면 그것만큼 없어보이는 게 없다. 복실복실, 적당히 통통한 외모에 대한 거부를 내려놓는다.
누구랑 차를 마시면 내가 낸다.
밥을 먹어도 내가 낸다. 그게 아깝지 않을 인연들만 남겼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전에 내가 샀지, 이번에 네 차례지 싶은 생각이 들만한 인연들은 모두 쳐냈다.
말이 많은 사람들도,
외모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너무 열심히 사는 사람도, 돈이 너무 많거나 적은 사람도 다 끊어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쇼펜하우머는 사교에 대한 욕구는 불행의 반증이라 했다.
쓸데 없는 인연들을 쳐내고 나에게 집중하자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
앞으로 더욱 조용하게 간단하게 행복하게 살기로 결심해보는 주말 오후다.
편안한 마음, 노 스트레스.
맑은 피부를 위하여.
앞으로 나는 그것에만 집착할 것이다. 너무 힘든 날엔 신경안정제도 거부하지 않을 거다.
절대 하면 안 되는 것도, 절대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도 없다.
지금껏 쌓은 삶에 대한 나의 태도, 가치관을 믿는다.
이제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말하면 크게 순리를 거스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잘 하고 있어.
토닥토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