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에서의 일이다. 추석을 앞두고, 부서 직원들의 자택 주소를 확인해야 했다. 대부분 메신저로 답을 줬는데 그즈음 이사를 했다던 직속 상사만 답이 없었다. 결국 직접 물으러 갔더니 미안하다며 포스트잇에 자기 집 주소를 적어 건넸다.
근데 A시 B구 C동 어쩌고저쩌고 뒤로 괄호 열고 81 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몇동 몇호까지 적은 다음에 적힌 숫자라 도통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서 물었다.
그냥 넘어갈 걸, 괜히 물어보았다.
- 평수.
- 네?
- 평수라고, 81평.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 연기하며 81을 강조하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언제부터 집 주소 뒤에 괄호 열고 평수를 적는 게 당연했던 거지?
당시 나는 손바닥만한 원룸에서 자취 중이었다. 세상에 81평 짜리 집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또 얼마 전에는 사촌오빠가 직장에서 승진을 했다. 평소 연락하지 않는 사이인데 그 오빠가 승진한 걸 알게 된 건 큰아버지가 가족 단톡방에 오빠의 승진소식을 뜬금없이 알렸기 때문이다. 승진했으니 축하해주세요, 도 아니었다.
- 우리 **이 승진, 대기업 임원급으로 보면 됨.
딱 이렇게 메시지가 왔다. 우리 가족 단톡방에는 아직 취업하지 못한 사촌동생이 둘이나 있다. 나는 이런 순간이 정말이지 너무 화가 난다.
언제쯤 부르르 끓어오르지 않고 그냥 넘길 수 있을까?
인간의 가장 천박한 본능이 자랑이라 생각한다. 상대보다 내가 우월하다고 안도하는 것까지는 백번 양보해서 이해하겠다. 근데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건 정말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나도 천박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며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상대 심정을 여러 번 생각하고 말하려고 노력한다. 배려도 지능의 문제라는데 어쩌면 나이와 함께 그런 쪽의 지능이 발달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내가 화가 나는 부분은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도 자랑을 참지 못하는 부류이다. 나이에 대한 기대가 있는데, 어른이라면 마땅히 어른스러울 거라고 예상대는 수준이 있는데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어른들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 원룸에 사는 내 앞에서 집 평수를 자랑하던 상사처럼, 취업 준비생들 앞에서 자식의 승진 소식을 전하는 큰아버지처럼.
그리고 화가 나는 동시에 다시 한번 스스로를 돌아본다.
늘 겸손한 태도로 사람들과 만나야겠다고 다짐한다. 대놓고 자랑하지 않더라도 생각 없이 올리는 사진 한 장이 누군가에게는 자랑처럼 보일 수 있고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예컨대 맛있는 음식 사진이라든가 예쁜 풍경 사진도 그렇다.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 기저에는 나는 이런 음식을 즐길만큼 여유 있고 이런 풍경을 보러 다닐 만큼 상황이 편안하다는 천박하고 경솔한 속내가 깔려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본다.
누구에게도 조금의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으로 매 순간을 걷는다. 그렇게 조심해도 나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미묘한 표정으로, 사소한 말투로 누군가는 나로 인해 상처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더 나아가 누군가의 자랑을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발끈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가능하다면 자랑하는 상대가 기분이 좋도록
따뜻하게 호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그에게도 나처럼
모든 자랑의 순간들이 거대한 수치심 덩어리가 되어 몰려 들지라도
민망하지 않도록 호응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아직 정확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노력만으로도
한 걸음 한 걸음씩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