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의 이율배반

일상. 유머의 감성 테마시

by 정하

그릇의 이율배반


다 먹은 그릇들이

개수대로 옮겨졌다.


삶의 가장 큰 이율배반이

식탁에 있다.

비포와 에프터가 극명하게 갈리는 현장


먹기 전 음식들은

예쁜 그릇에 담겨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러운 모습으로

욕망을 최고치로 끌어올린다.

절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하는

신묘막측한 능력을 지닌 채,


욕망이 해소되고 난 후 빈 그릇에는

빨간 고춧가루와 기름 찌꺼기가 범벅

비루한 모습이 덕지덕지 껴있다.

모멸감 섞인

따가운 시선이 달라붙기도 한다.


한순간 나락에 떨어진

그릇을 구출하기 위해

개수대에서 특공 작전이 펼쳐진다.


뜨거운 물에서

수세미는 거품을 뒤집어쓰고

맹렬하게 그릇들을 샤워시킨다.


고춧가루와 기름 찌꺼기가

먼저 흘러내리고

눌어붙은 밥풀이

끝까지 버티다 떨어진다.


그릇들은

비루의 행색을 벗기 위해

따가운 수세미질을 견딘다.

방금 전의

찬사를 받던 얼굴로

되돌아가기 위해

뜨거운 물의 세례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뽀드득 말끔하게 샤워한

그릇들은 자존감을 회복하고

건조대에 올라간다.


다음 끼니 때

식탁의 무대에서

빛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한숨 내려놓고

편안한 휴식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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